1633년 6월 22일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피고인에게 재판관은 유죄를 선고하고 선고문을 낭독하게 했다. 피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선고문을 낭독했다.“나는 이단, 즉 태양이 우주에 중심에 있고 움직일 수 없으며 지구가 그 중심에 있지 않으며 태양이 움직인다고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하게 의심되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중략) 앞으로도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그래도 지구는
1916년 미국의 마가렛 생어는 계획되지 않은 임신으로 많은 자녀를 가진 가족들의 어려움을 목격했다. 몇몇 가족은 10명이 넘는 자녀를 돌보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특히 자리를 잡지 못한 이민 노동자들에게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중세 기독교 문화로 피임과 낙태를 죄악시 여기는 문화로 가족계획 방법을 홍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마가렛 생어는 여성들을 상담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30일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그러나 생어의 투옥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피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면서 의료계에서 피임약을 개발하는 데
심장을 가리키는 마음 심(心)은 과거 심장이 정신을 주관하는 장기라는 인식으로 만들어진 한자다. 고대 동양에서는 심장이 정신 상태를 주관하는 장기로 생각하였고, 뇌는 단지 심장의 열기를 발산시키는 장소로 평가했던 것이다.기억을 저장하고 주관하는 장기가 심장의 기운으로 생각했기에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심장 이상으로 생각했다. 심장에 있는 혈액이 부족해지면 어지러워지고 의식을 잃을 수 있으니 어쩌면 고대인들의 생각은 그러한 추론의 결과일 수 있다.에서도 건망을 주로 심(心)과 비(脾)의 문제라고 단정하며 심과 비를 생각하는
주변에서 부지런하고 온화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한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을 ‘향원(鄕愿)’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마을에서 인상 좋고 존경받는 어르신과 같은 분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마을 어르신들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공자는 그런 향원들을 향해 덕을 훔치는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겉으로 후덕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의 사욕을 챙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이지만, 맹자는 공자의 주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비판하려고 해도 딱히 집히
1883년 6월 16일 토요일 저녁 영국 북동부 선덜랜드의 빅토리아 홀에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 활동을 많이 하던 목회자 에드워드 백하우스의 기금으로 설립된 빅토리아 홀은 사회, 정치, 종교 행사에 활용되었다. 특히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이 벌어지곤 했다. 6월 16일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페이 남매로 알려진 마술 공연팀은 이미 몇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꼭두각시 인형극 등 마술 쇼를 보여주면서 아이들을 열광시켰다. 빅토리아 홀은 무대를 중심으로 3개층에 층마다 1000여명이
섬나라였던 호주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자 곧 모든 선박에 대해서 해상 검역을 실시했다. 1918년 실시한 해상검역에서 323척의 선박 진입을 중지시켰고, 그중 174척에서 1000여명의 독감 환자가 발견되었다.확진자가 발견된 배는 전원 마스크를 착용하게하고 2주간 격리시켰다. 호주는 지리적인 장점을 잘 살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수 천만 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의 유입을 막았다. 극심했던 스페인 독감은 1918년 말경 감소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큰 피해를 준 독감이 감소했다.제1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식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부에서 말 한 마리가 사라졌다. 귀중한 재산인 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이웃 사람들이 위로했다. 정작 말을 잃어버린 당사자는 “이 일이 도리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면서 태연했다.정말 얼마 뒤 사라졌던 말은 다른 말들과 함께 돌아왔다. 좋은 말을 공짜로 얻은 셈이니 주변 사람들이 와서 축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이것이 오히려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하면서 덤덤했다.새로운 말을 시험 삼아 타보던 아들이 낙마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다. 아들은 다리를 절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아들의 부상을 위로
미국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으로 연수를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모든 의사들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의과대학교가 신설되었는데, 1800년 4곳에 불과했던 미국 의과대학은 1860년 47곳, 1900년에 160곳까지 늘었다.교육은 부실했고 졸업한 의사들은 자기 실력을 믿을 수 없어 진료를 시작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의사는 많아졌지만 역설적으로 국민은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1892년 오슬러는 미국의 존스홉킨스병원이 개원하면서 의과대학 교육을 새롭게 구상했다. 의과대학생들도 함께 임상 현장에 참
1889년 프랑스 탐험가이자 학자인 샤를 바라가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급격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샤를 바라는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방문하는 서구인들과 달리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서 부산까지 내륙을 횡단하기로 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전염병으로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선의 진짜 모습을 보기로 한 샤를 바라는 과감하게 일정을 진행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강을 건너고 도시를 지나갔다.샤를 바라
산에 있는 여러 풀 중 질병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찾아 채취한 뒤 말리는 작업을 해서 보관하는 과정은 많은 힘이 들었다. 특히 최근에도 건강기능식품에 백수오와 비슷한 이엽피우소가 혼입돼 문제가 발생한 경우가 있을 정도로 약초와 독초의 감별은 쉽지 않았다.에는 실록 숙종 37년 8월 3일자에 영동·영남에서 진상하는 인삼을 붙여서 만든 것도 있고, 서북의 인삼은 푹 삶아 쪼개서 도라지 등을 넣어 엄히 처벌하자는 내용이 보인다.약초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다. 상처나 골절과 같은 직관적으로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있던 조선의 인조는 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에는 높은 단 위에는 청나라 태종이 앉아 있었고,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이어졌다.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는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달하는 빠른 진격으로 조선의 허를 찔렀다. 임경업 등 수많은 조선의 장군들은 산성에 있었으나, 청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바로 조선의 수도로 진격한 것이다. 인조는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47일간 농성했으나, 결국 추위와
에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 이야기가 등장한다. 처용은 신라에서 관직을 얻어 봉사했으며 역신을 춤을 춰서 물리쳤다는 고사가 에 나온다. 처용에 대해서 여러 설이 존재하나 전해 내려오는 특이한 외모는 외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중동 지역 출신일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까지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876년 중국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황소의 난‘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던 이슬람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일부는 탈출해 다른 지
1752년 6월 폭풍우가 몰아치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마을에서 연이 하늘에 떠 올랐다. 십자가 모양의 단단한 삼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비단을 단 연은 강한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갔다. 이날 아들과 함께 연을 날린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번개가 전기와 같은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에 나선 것이다.마찰을 통해 발생되는 정전기를 현상을 넘어 전기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이 1745년 네덜란드 라이덴 지역의 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라이덴병이라고 불리게 되는 일종의 축전기는 전기 성격을 연구하는 전환점이
에 명의로 나오는 화타는 조조의 두통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도끼로 머리를 쪼개어 뇌 속에 있는 병의 근본을 치료하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한 조조는 화타를 옥에 가두게 했고, 화타는 옥중에서 사망했다.연의에서는 화타의 뛰어난 의술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조조의 두통을 치료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중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고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두통에 시달리던 예민한 성격의 조조는 치료 방법에 대해서 확신을 주지 못한 화타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격노
1967년 미국 뉴욕 베스 이스라엘 병원에 일본인 레지던트 신야 히로미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진행되던 내시경 검사법 연구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다.광섬유가 소개되면서 빛을 모아 인체 내부 장기에 조명을 주고, 동시에 내부 영상을 카메라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이 시도되고 있었다. 곡선이 적은 인체 내부 영상은 간단한 장비로 접근 가능했지만 굴곡이 많고 꼬임이 많으며 1미터가 넘는 길이를 관찰해야 하는 대장과 소장은 쉽지 않았다. 당시 기술로는 30~50cm 정도의 구불결장까지가 한계였다. 격렬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마
용인시 코로나19 확진자 38만명, 사망자 170명, 치명률 0.04%로 전국 평균보다 낮아 보이지만 요양원에서 사망한 환자를 포함하면 사망자가 359명으로 상당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오미크론 변이 이전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로 시민들의 협조로 진행됐으나, 오미크론 유행 이후 일 확진자가 1만명을 넘어서면서 지역의료기관의 적극적인 진단 참여와 민간 병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참여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오미크론의 큰 파도를 넘기면서 코로나19 유행 과정에서 용인시의 의료체계를 다시 한번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코로나19라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화두는 세계의 여러 문제점을 발생시키는 반지성주의 극복이었다.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에 반해서 집단적 갈등과 이념의 차이로 사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대방을 억압하려는 행동은 최근 국회 청문회장에서 “이모”와 “3M” 상황까지 초래했다.반지성주의는 진시황제 때 유명한 분서갱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문자와 도량형뿐 아니라 통치 형태도 과거의 봉작제도에서 군현제도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당연히 춘추전국시대에 남아있던 귀족들은 저항했고, 이를 적폐로 규정하면서 가혹하게 탄압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와는 400여 척의 함선을 부산에 상륙시키면서 순식간에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왜군을 막기 위해 경상도 지역의 조선군은 대구로 모이기 시작했다. 5만여 명이 넘는 병력이 집결했다. 조선의 군사전략은 지방 군벌을 막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한 장군이 현장 병력을 통솔하게 했다.북방에서 여진족과 전투에서 명성을 날리던 이일이 대구로 급파되었다. 그러나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왜군이 대구로 향하고 있었다. 수 만 명의 병사들이 모였지만 군량도 무기도 지휘관도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근거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았다. 울산성에서 고립돼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던 경험을 살려 곳곳에 식용이 가능한 조롱박이나 은행나무, 소나무, 토란을 심었다. 식수를 위해 우물을 120개나 만들었다. 성문이 29개나 있고, 망루가 49개, 높은 누각을 가진 천수각이 3개나 있었다.가토 기요마사가 심혈을 기울여 축성한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천재지변 앞에 무력했다. 수많은 지진속에 곳곳이 무너지고 다시 수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1
먹을 갈아서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면 물의 농도에 따라 조금씩 번져나갔다. 미세한 번짐을 이용한 효과는 붓글씨의 매력이기도 하다. 잔잔하게 흰 공간에 퍼져나가는 먹물의 번짐은 물의 기운이 다하면 멈춘다.흰 종이에 검정색 먹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 같이 천에 색깔을 입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의복이 개발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선명한 붉은색 빛깔은 고귀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색깔을 내는 염료를 얻는 방법은 색깔이 있는 식물 등에서 추출하는 고된 작업이었기에 비싼 가격이었고 서민들이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18세기 서구에서 철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