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포털에 노출되는 지명 검색어 중에 ‘남사’가 가장 많았다는 뉴스를 접한 바 있다.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이 갑자기 주목받은 것은 지난 3월 첨단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로 전격 발표되면서다.발 빠른 미디어에선 부동산 경기에 주목하며 집중 보도했던 곳이 바로 한숲시티 아파트 단지다. 별 인기가 없어 ‘한숨시티’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거래가격이 급격히 상승한 것은 물론이다.2015년 10월 분양 당시 6천725가구가 한 번에 분양되면서 주목받기도 했던 곳이다. 2017년 7734명에 불과하던 남사면 인구는 아파트단지 조성에 힘입어 2021
용인이란 도시의 지리적 특성 중 하나는 거점형 구조라는 점이다.비슷비슷한 규모로 3~4개 권역이 형성돼 있다. 처인·기흥·수지·구성권역이다. 용인시청이 있는 처인구 삼가동을 용인 중심이라 말하기 뭣하다.한편으론 선형도시적 특성도 지녔다. 오랜 역사를 가진 원도심을 정점으로 확산해 나가는 방사형 도시구조와는 다른 모양새다.이처럼 선으로 연결되며 길게 늘어지다 보니 교통체계를 비롯한 도시인프라 갖추기와 이용이 불편하다.사진을 보면 2004년 경 시청을 좌측에 두고 처인구 중심권역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도심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전체면적은 415만 3502㎡(약 126만 평) 규모다.이미 각 공간 구성에 대한 설계는 잘 알려져 있다. 핵심인 SK하이닉스 부지는 185만 8181㎡(약 56만 평)이다. 전체 면적의 44.7%에 해당한다. 이곳엔 핵심시설인 펩(공장) 4기가 들어서게 된다. 사업지에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사진 아래 부분이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청룡말이다. 구조상 하류 쪽인데 하수처리시설, 오폐수 처리시설, 폐기물 처리시설, 배수지, 집단 에너지시설, 변전소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원삼초등학교 주변과 독성리 하
사진 찍은 날짜를 보니 2008년 4월 19일이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깊이 새겨진 날이다. 이맘때면 온 대지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연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농부는 옅은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아침나절부터 바삐 몸을 움직인다. 처인구 김량장동 은덕골은 돌봉산 남쪽 밑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산동네로 약수터가 유명했다. 남쪽으로 용인의 중심 김량장동을 늘 내려다보게 된다.2008년 사진 속에는 나무와 숲에 가려 도심 경관은 흐릿하게 드러난다. 용인은 어딜 가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옛 영화에 비하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간혹 1년 같은 하루가 있다. 경험적으로 대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다.SK산단클러스터사업이 진행 중인 처인구 주민들에게 2년이란 시간은 어땠을까. 그 사이 대부분 주민들은 이미 삶터를 떠나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그 사이 토지보상을 둘러싼 지난한 줄다리기와 갈등 등 하루하루 잠잠한 날이 없었다.토목공사는 이미 본격화됐다. 토지보상이 거의 다 된 가운데 사업시행자인 용인일반산업단지(주)는 현재 소유권이 확보된 토지에 대해 터파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처인구 원삼면 독성리와 죽능리라는 지명인들 제대로 남아있게 될까. 해서
용인테크노밸리일반산업단지(덕성산단)가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에 추진될 당시만 해도 산단 유치는 용인의 숙원사업으로 인식됐다.㈜녹십자와 같은 큰 기업들이 신도시 아파트 건설에 밀려 용인을 떠나다 보니 지방 세수가 줄게 됐다. 일자리와 거주가 일치하는 자족형도시라는 지향에도 벗어났다. 단체장으로선 산업단지 유치가 큰 숙제였다. 선거 때면 너도나도 핵심공약이었다. 불과 7~8년 전 얘기다.급하게 서둘렀던 용인테크노밸리엔 첨단 산업시설이 아닌 물류센터까지 들어섰다. 부지 물량을 채우기 위해 불가피했다지만 아쉬움이 남는다.바로 옆으로 최근 국
처인구 김량장동과 남동이 걸쳐있는 처인구 도심의 남쪽 모습이다.1986년 당시 용인문화원 주최로 용구문화제가 처음 열렸다. 그 장소가 바로 터미널 부지 공터다. 용인문화원은 당시 용구문화(龍丘文化)라는 계간지 발행과 함께 향토전통축제 발굴에 나서 ‘용구’문화제를 열었다.그네뛰기, 두레경연, 씨름대회 등 주로 민속중심의 내용으로 채워졌다. 오늘날 포은문화제와 처인성 문화제가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다.당시만 해도 용인사거리 가까이에 공용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가까운 장소로 이전을 준비 중이었던 공터다. 37년이 지난 그 지역은 여전히 터
수지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다. 대한민국 난개발사에 주로 등장하는 지역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35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사진 속 1988년은 수지면 지역이다. 현 수지구 전체와 다를 바 없다. 그 직전인 1983년엔 이의리, 하리가 수원에 편입돼 면적이 줄었다. 1996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하자 면에서 읍이 됐다. 곧이어 2001년엔 수지출장소로 다시 승격되면서 리(里)가 동(洞)으로 바뀌었다. 2005년 수지구청이 됐다.1914년 수지면에서 읍까지 82년이 걸렸다. 반면 읍에서 구까지 승격하는 데 단 9년이면 족했다. 19
처인구 이동읍이 다시 뜨겁다. 이동읍과 남사읍에 걸쳐 국가산단 계획이 전격 발표되면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됐다.이동읍 덕성리는 이미 용인테크노벨리(덕성1산단) 조성이 마무리된 가운데 2산단 사업 본격 추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덕성리는 원덕성리, 금현, 삼배울, 신창 등 4개 마을이 있다. 이미 마을 두 곳은 원형이 사라져 나머지 동네도 온전할 거로 믿는 이는 드물다.입장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공동체 해체란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오랫동안 누대에 걸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태 만에 사진으로 만나는 마을 모습이다. 멋진 농경지와 안온했던 동네가 사라졌다. 누대에 걸쳐 살아온 주민들 입장에선 가슴이 미어질 듯하다.처인구 원삼면 독성리는 하사(1리), 잿말(2리), 야광(3리)이 있는데 온전히 남는 동네는 ‘야광’마을뿐이다. 잿말은 전체가 SK산단 사업부지에 포함됐다.이미 가옥은 전부 철거를 한 상태로 마을에 사는 이는 없다. 새로운 삶터를 찾아 곳곳으로 흩어졌다. 125만평에 달하는 SK반도체클러스터 부지 터파기 공사가 이미 본격화됐다.그 높던 구봉산 자락 산줄기가 어느새 절반은 사라져 버렸다. 그간
처인구 역북동 명지대역에서 명지대 사거리를 연결도로 220m 길은 도시계획도로다. 이미 오래전부터 확장 설계가 돼 있었지만 10년 남짓 걸린 듯하다.고속도로, 국도 등과는 달리 용인시 예산이 투입되는 도시계획도로는 대개 설계 후 오래 걸리는 게 현실이다.예산이 걸림돌이다. 아직도 처인구 경전철 역사 주변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다. 역세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신갈천을 사이에 두고 기흥구 상갈동과 신갈동이 마주한다. 한때 신갈의 번성을 상징했던 업소와 건물을 통해서도 비교가 되곤 한다.박승식(60) 씨가 운영했던 은 전통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신갈지역의 대표 식당이었다. 한국민속촌과 경기도박물관 등 주로 외국 또는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그러나 지난해 문을 닫고 철거됐다. 그 자리엔 고층 복합건물이 한창 공사 중이다.상호 ‘박카스’ 옥상간판이 크게 세워져 있는 빌딩은 로 불렸다. 한 시절 규모 있는 행사나 집회는 대부분 이곳에서 치러질 정도였다. 뷔
기흥구 상갈동에서 바라본 신갈IC 주변이다. 교통망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왼편에 보이는 흥덕동 두진아파트(1996년)와 신일아파트(1998년) 준공시점으로 봐선 1990년대 말 사진으로 보인다.43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 신갈(수원)IC가 연결되는 간결한 도로망이 매우 복잡한 구조로 바뀌었다. 특히 도로 위로 도로가 층층이 올라가는 ‘4중 도로’는 용인에서 유일하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을까 싶다.멀리 수원방향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돌고개(석현) 넘어 흥덕동 신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신갈동 상미마
용인성당의 출발은 양지본당 용인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부터다. 1956년 건립기성회가 조직돼 처인구 김량장동 133-28번지 부지 약 370평을 매입했다.당시엔 제재소와 목욕탕이 있었다. 1957년 12월 25일 새로 지은 성당에서 첫 성탄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김량장 시대를 알렸다.그 당시 김량장을 보여주는 여러 사진을 보면 첨탑이 있는 고딕양식의 용인성당이 가장 돋보였다. 용인의 랜드마크 격이었다.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용인성당은 아쉽게도 1982년 6월 24일 헐렸다. 3년 후 김량장동 64번지 현재 위치로 옮
기흥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만들어졌다. 기곡면과 구흥면을 합치고, 지내면 일부인 영통리가 포함돼 기흥면이라 했다.1985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했으니 71년 만이다. 오늘날 그 자리는 기흥구 신갈동주민자치센터와 행정복지센터로 쓰이고 있다.기곡면은 보라·공세·지곡·고매동 지역으로 행정소재지가 있던 구성을 기준으로 남쪽 관문에 해당한다. 구흥은 구갈·신갈동 지역으로 처인구 쪽에 가까운 지역이다. 아마도 기흥의 중흥기는 읍으로 승격했던 1980년대 중반부터가 아닐까 싶다.시의원을 지낸 이양구 초대 기흥
용인 기흥구 흥덕동(영덕동)은 수원시와 맞닿아있다. 행정구역상 경계마을이지만 사실상 영통생활권역이라 해도 무방하다.지리적으로 광교테크노밸리(약 335만 평)와 영통신도시(약 100만 평) 사이에 있는 65만 평 규모의 신도시로 조성됐다. 조성 당시 ‘유비쿼터스 디지털 시범도시’로 널리 홍보됐던 것이 생각난다.지금이야 수원시와 용인시가 나란히 ‘특례시’라는 동등한 위상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수원시의 뜻대로 떼어주어야 했다. 이의동이 대표적인데 1983년 2월12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 하리가 수원시에 편입됐다.《이의동지》(
도시화는 필연 자연의 영역을 인공구조물로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처인구 김량장동 은덕골에선 더 이상 양계장, 포도밭, 약수터, 텃밭, 지천에 널린 꽃들을 보기 어렵다. 한 치의 땅도 놓아둘 수 없도록 인심은 흘러간다.은덕골은 예전에 북구로 통했다. 김량장을 중심으로 방위각에 따른 동서남북 개념이다. 은덕골은 돌봉산에 오르는 길목이다. 지대가 높은 산동네다. 반대편 서구는 노고봉이 우뚝 버티고 있다. 김량장동은 돌봉산과 노고봉 사이의 분지형 입지다.그러나 은덕골에서 바라본 카메라 앵글엔 노고봉이 점차 가려진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철도선로의 궤도 폭은 1435㎜라고 한다. 협궤열차는 일반선로의 그 절반으로 762mm이다. 이재규(1936~2021)선생 이 제공한 옛 사진을 보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철로를 짚고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내복까지 드러낸 이 사진은 아마도 젊은 시절 다양한 포즈 중에도 압권이 아닐까싶다. 당시 선로 폭이 채 1미터가 안되니 가능했을 사진이다. 수여선은 협궤열차가 다니는 길이었다.1972년 폐선 후 선로를 걷어냈지만 옛 철길은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 기흥구 중리 초당곡부터 어정까지 대부분 남아있던 그 길은 주민들의 사랑을
지장실은 처인구 유방동에서 석성산(처인구 포곡읍) 자락 바로 아래 동네다. 용인12실의 하나로 불리는 곳이다.‘12실’은 전쟁의 화를 피할만한 은거지 12곳을 말한다. 보통 ‘피난꼬지’(피난곶이)라 하는데 지장실은 그만큼 외졌으며 깊은 골짜기 마을이란 뜻이다.밀양 박씨가 터를 잡은 뒤로 400여 년 내려온 유서 깊은 동네다. 골짜기가 4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산세가 험하다. 호랑이굴 전설도 전해지는 마을이다.사진을 찍은 2005년 12월 20일만 해도 뒤로는 석성산을 등지고 앞으론 농지가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마을 모습이었다. 최근
용인하면 떠오르는 수식어 중에 급변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다.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지자체 가운데 손꼽히는 곳이 용인이기 때문이다.‘상전벽해’의 고장 용인 모습 중 용인시청 주변은 예외적이라 할 만큼 변화가 없다. 경전철이 생긴 것 외에 도로 확장과 몇 개의 건물이 새로 지어진 것뿐이다.이유야 대개 알고 있듯 역삼지역주택사업이 십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민간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용인특례시를 비롯한 공공영역이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대한민국 ‘10대도시’ 용인특례시 행정기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