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아는 목화에서 목화씨를 분리하는 도구이고, 멍에는 쟁기나 써레질 할 때 소의 목 위에 걸치는 연장이다. 지금은 소도 논밭에서 일을 시키지 않고 목화를 심어 길쌈을 하는 집도 없다. 용인의 경우 1950년대나 60년대 초까지 부분적으로 길쌈을 하는 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 이후에는 경운기와 트랙터 보급으로 소도 더 이상 일소로서 역할은 하지 않게 됐다.씨아는 직사각형의 나무토막을 바닥에 나란히 몸체로 하고 그 위에 2개의 기둥을 박은 다음, 그 윗부분에 롤러처럼 둥근 나무 2개를 맞물려 끼운다. 한쪽에는 기아 모양
씨앗은 곡식이나 채소 따위의 씨를 말한다. 한자로는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일상에서는 씨앗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농사꾼은 죽어도 씨앗자루를 베고 죽는다’는 말처럼 농촌에서 씨앗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농업이 중심이었던 예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노적(露積)은 이슬을 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슬을 맞을 수 있는 밖에다 쌓는다는 말이다. 야적(野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농촌에서 노적보다 노적가리라는 말로 더 많이 쓰였던 용어였다. 지금은 노적가리가 있지도 않고 있을 필요도 없다
개는 인간이 가장 가까이하는 동물이다. 동물이라기보다 가족같이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양보다 서양에서 더 애호(?)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몇 안 되는 나라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해 졌지만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난 뒤 서양 일부에서 개고기를 빌미로 벌어진 보이콧 움직임이 있었는데 개고기에 브루셀라균이 있다고 발표해 보신탕집이 단숨에 된서리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일부는 영양탕이나 보양탕, 사철탕 등으로 간판을 바꾸고 영업을 계속했는데, 지금도 보양탕이나 영양탕은 보신탕을 가리키는 것으
수정은 광물로 보석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한때 수정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자수정의 품질이 좋기로 이름났다. 수정은 투명함 자체만으로도 보석 이상의 가치가 있다. 수정이 보석 반열에 들 수 있는 것도 깨끗하고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수정은 보석뿐만 아니라 인장을 새기거나 안경렌즈를 만드는데도 사용됐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경주 남산에서 나는 수정을 안경알 만드는데 최고로 쳤다.안경알 수정을 만들 경우 안질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 많이 썼다고 하는데 땅속에서 캐낸 신비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수정렌즈를
땅이름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땅이름에 붙기도 하고 심지어 상스럽거나 촌스러운 이름까지 지명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용인 관내에 있는 쥐산이나 쪽박산, 공알바위나 불알배미, 개고개 등도 그중의 한 예가 된다.기름고개(油峴)와 방울고개(鈴峙)도 비슷한 지명인데 기름고개는 수원으로 넘어간 이의동에 있고, 방울고개는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에는 기름재고개와 방울재로 나와 있다. 기름은 참기름이나 들기름처럼 가정에서 상용하는 것들이다. 석유나 경유도 기름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없
열원이고개는 기흥구 보정동에 있는 고개이다. 마북동 한성CC 사거리에서 보정동 연원마을 삼거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본래 모습이 사라졌다.보정동에 속한 마을 가운데 연원(蓮院)마을이 있는데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래가 실려 있다. ‘연원마을은 보정리에 속한 마을로 속칭 열원이라고도 한다.본래 이 마을에 조선시대 역원(驛院)제도의 하나인 보시원(普施院)이 있던 곳이었으나 원(院, 여관, 여객이 묵는 객사)이 폐지된 후 오랜 세월이 경과됨으로써 유래가 변질돼 마을
굴암(窟巖)은 처인구 이동면 묵리에 있는 마을이고 구람말은 호동에 딸린 마을이다. 또 양지면 송문리에 송동(松洞)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예전에는 구란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렀다.굴암은 마을 위에 있는 용덕사를 굴암절이라고 부를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실제 절 위쪽에 용이 승천했다는 용굴이 있고, 지금은 거의 무너졌지만 예전에는 서너 명이 충분히 들어가 앉을 정도로 넓은 암굴이 남아 있다. 굴암이라는 지명은 용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설명이 많은데 일부이지만 마을 뒤 암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이들도 있다.구람말은
새꼬지보와 애오리보는 처인구 유방동과 고림동 사이에 흐르는 경안천에 있는 보 이름이다. 대부분의 보에는 운학보나 남리보, 삼계보처럼 부근 마을 이름이 붙거나 리명(里名)이 붙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마을 이름이나 리명 이외에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도 많다. 경안천의 발원지인 문수샘부터 모현면 일산리와 광주시 오포읍 경계까지 20여개 이상의 보가 있는데 낭냉이보나 계선이보, 새꼬지보나 애오리보, 독깝보 등이 인근 마을 이름이나 리명과 관계없는 독특한 이름들이다.낭냉이보는 운학동 먹거리마을 앞 운학천에 있는 보이다. 낭냉이가 무슨 뜻인지
고잔은 다른 땅이름들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마을이름이다. 인천이나 안산의 고잔동이 유명한데 한자로는 모두 고잔(古棧)으로 쓴다. 당연히 ‘오래된 잔교’와 같은 지명풀이가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는 ‘곶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고잔이라고 부르는 마을들이 곶(串)의 안쪽이나 곶(串)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자로 어떤 표기를 하든 위와 같은 풀이는 정확한 설명이 된다.고잔은 곶의 안>곶이안>고지안>고잔으로 변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말 땅이름이 그러하듯이 고
바위는 부피가 매우 큰 돌을 이르는 말이다. 돌을 석(石)으로 쓴다면 바위는 암(巖)으로 쓴다. 모래를 가리키는 사(沙)나 사(砂), 자갈을 가리키는 력(礫)도 있으니 돌의 크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바위는 대부분이 생긴 형태를 따라 이름이 붙는다. 예를 들어 코끼리바위는 코끼리를 닮아서 생긴 이름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코끼리가 일반적 상식으로 인식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글에서나 알 수 있었을 뿐이고 꼬끼리바위 이전에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는 상암(象岩)이라는 한
지명에는 숫자가 붙는 경우도 많다. 면(面) 이름에 숫자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몇 개 면을 합쳐 하나로 만들면서 숫자가 들어간 이름이 많이 생겼다. 처인구 이동면(二東面)이 대표적인데 상동촌면(上東村面)과 하동촌면(下東村面)을 합쳤다는 뜻이다. 남사면(南四面)은 남쪽 네 개 면이 합쳐서 생겼다. 외사면(外四面)과 내사면(內四面)도 있었는데 지금은 백암면과 양지면으로 옛 이름을 되찾았다.갈비와 막걸리로 유명한 포천의 일동이나 이동도 같은 예에 속하는 지명이다. 어르신들이 가끔 하는 말 가운데 “산수갑산을
분토(粉土)는 쌀을 쓿을 때 쓰는 희고 고운 흙을 가리킨다. 쌀을 쓿는다는 것은 절구나 방아에 찧어 곱게 깎아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연자방아나 디딜방아 또는 절구로 쌀을 찧었는데 마지막 과정에서 하얗고 고운 흙가루를 넣어 쌀이 덜 깎이고 희고 고운 빛이 나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되는 흙을 분토라고 한다.쌀을 찧는 과정에서 분토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웃 일본에서도 예전부터 사용돼온 방법인 듯하다. 1931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동경발로, ‘미맥(米麥)정백(精白)에 사용하는 분토(粉土) 인체에 유
용인에는 시드머니와 시드머리라는 땅이름이 있다. 시드머니들은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 있고, 시드머니골들은 포곡읍 유운리에 있다. 포곡읍 전대리에서 57번 지방도를 따라 신원리 방향으로 가면 유실마을 신일교회 앞에서 오른쪽으로 용인레스피아 정문 앞에 있는 들이 시드머니골들[坪]이고, 직진해 유실마을 앞에 있는 들이 시드머니들이다. 시드머니나 시드머리나 처음 듣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나타내는 지명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마을 사람들도 정확한 유래를 잘 알지 못한다.시드머니는 시그머니나 시그머리, 또는 시드머리로 발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고려장에 관한 설화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일제 때 우리 민족을 비하하기 위해 지어낸 설화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어디를 봐도 부모를 버리는 풍속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 제기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일제 초기에 만들어진 설화로 인식하고 있는데 도굴꾼들이 널리 퍼뜨렸다는 이야기는 특히 설득력이 있다. 비록 돌보는 이가 없다 해도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이 무덤은 고려장 터이기 때문에 파도 좋다는 인식
명매기라는 철새가 있다. 명매기는 귀제비라고도 하는데 제비의 사촌쯤 된다. 여름 한철 개울가 바위 벼랑에 집을 짓고 사는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불길한 새로 여겨져 마을에 들어오면 집집마다 쫒아내기 일쑤였다.명매기도 제비처럼 논의 진흙을 물어다 집을 짓는다. 기둥 위 상방이나 서까래 밑에 집을 짓는 것도 제비와 비슷하다. 그러나 집모양이 제비집과 다르다. 제비집은 원뿔모양의 깔때기를 수직으로 자른 것처럼 위로 올라가며 넓어지고 그 안에 새끼를 친다. 그러나 명매기집은 길게 주머니나 자루처럼 짓고 한쪽에 난 구멍 속으로 드
모산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에 딸린 마을 이름이다. 장전평과 독산마을 사이에 있는데 「연혁대장」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예전에 방어사를 지낸 정씨란 사람이 모초산(茅草山) 아래 거주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해서 모산으로 호칭하게 된 것이라 한다.모산은 우리말 이름으로 매자리라고 한다. 맷자리, 매짜리 등으로도 소리 나는데 발음상 차이일 뿐 같은 이름이다. 매자리는 매고지와 비슷한 이름이어서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매고지나 매자리처럼 앞에 ‘매-’가 들어가는 땅이름은 매(梅)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설명에
장계와 강촌은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에 딸린 마을로 보통 쟁견내와 강가말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장계(長溪)와 강촌(康村)이라고 쓴다. 편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마을 서쪽에 소류지가 하나 있는데 그 곳으로부터 청미천으로 들어가는 시냇가에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해서 장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은 본래 장계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고로(古老)들은 장계라고 호칭하고 있다고 돼 있다.또 강촌은 본래 강가말이라고 했는데,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이 강가였기 때문에 사람
땅이름은 공통점이 많다. 사람들이 보는 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명은 용인 내에만 독창적이고 유일하게 있는 게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로 옮길 때도 같은 관점이나 발상에서 한자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다.큰골을 덕곡(德谷)으로 쓰거나 돌꼬지를 석화지(石花池)로 쓰는 것이 이런 예에 속한다. 또 다리꼴은 달 월(月)자를 써서 월곡(月谷)으로 쓰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러한 방식의 한자 지명 역시 전국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한자화 된 지명의 역사가 오래되면
소마니고개는 기흥구 신갈동과 보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영동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와 만나서 서울 방향으로 합류하는 곳이 대략 소마니고개가 있던 곳이다. 소마니고개는 손맞이고개가 변한 것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고개’라고 한다. 따라서 한자로 망객현(望客峴)이라고 표기한다.소마니고개가 있던 바로 남쪽에는 신역동마을이 있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신역동마을은 신촌과 역동을 합쳐 생긴 이름으로 본래는 영남대로상 구흥역이 있던 곳이다. 구흥역의 본래 이름은 용흥역(龍興驛)인데 조선 초에 명신이었던 하륜이 지
말치는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한터마을에서 동쪽 용화사 방향으로 말치골을 지나 정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정수리에는 작은 말치고개가 있고 더 아래편으로 말치들이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에 속한다.또 원삼면 학일리에도 말치가 있는데 고초골에서 서남쪽으로 안성 미리내 천주교성지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고초골 위편을 말치골이라고 부르고, 그 위에 있는 고개가 말치인데 마치라고도 발음한다.말치는 한자로 마치(馬峙)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대리의 말치는 에 말치령(末峙嶺)으로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