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곡식이나 채소 따위의 씨를 말한다. 한자로는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일상에서는 씨앗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농사꾼은 죽어도 씨앗자루를 베고 죽는다’는 말처럼 농촌에서 씨앗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농업이 중심이었던 예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노적(露積)은 이슬을 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슬을 맞을 수 있는 밖에다 쌓는다는 말이다. 야적(野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농촌에서 노적보다 노적가리라는 말로 더 많이 쓰였던 용어였다. 지금은 노적가리가 있지도 않고 있을 필요도 없다. 논에서 추수하면 곧바로 미곡처리장으로 보내버려서 아예 멍석조차 쓸모없게 됐으니 그야말로 벼농사에 상전벽해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노적가리를 만들었는데 노적가리는 노적과 가리가 붙은 말이다. ‘-가리’는 나무나 곡식 단을 쌓아놓은 무더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수량(數量)을 세는 단위로 사용되기도 했다. 노적가리는 나락가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적가리는 가을에 벼를 베어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다. 예전에는 타작을 모두 손으로 했기 때문에 농사가 큰 대농(大農)이나 지주(地主)들은 수확할 논이 너무 넓어서 벼 베기와 추수를 한꺼번에 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 노적가리를 만드는데 벼를 베어 말린 볏단을 벼이삭이 가운데로 가게하고 벼 밑동이 밖으로 나오게 해 둥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높다랗게 쌓아올린 다음 위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주면 노적가리가 완성된다. 큰 논이면 여기저기 노적가리가 만들어지는데 이듬해 봄에 노적가리를 헐어서 타작을 하곤 했다.

어려서 듣던 부잣집 얘기 가운데 “황새가 노적가리에서 새끼를 쳐 나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높은 나무에 집을 짓는 황새가 노적가리 위에 집을 지었으니 큰 부자라는 것이다.

노적이나 씨앗이 땅이름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유명한 노적봉(露積峰)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목포 유달산과 노적봉의 내용이 가장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을 볏짚으로 엮어 덮어서 군량으로 위장해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노적봉은 용인에도 있는데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내동마을 앞에 있고, 양지면 송문리 송동마을에는 노적산이 있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노적봉의 유래는 아는 이가 없게 됐는데 봉우리 형태에서 비롯된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 사암리 노적봉의 경우 건드리면 화가 미친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실제로 몇 해 전에 집을 지으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았다고 한다. 

씨앗들은 백암면 근삼리 장계마을 앞에 있다. 또 사암리에는 띠앗터가 있는데 띠앗은 씨앗의 변음으로 보인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띠앗들과 씨앗들이라는 우리말 지명이 나오는데 각각 모안평(茅安坪)과 종개평(種介坪)으로 표기하고 있다. 종개평 옆에는 종개보가 있는데 청미천에 있는 보(洑)를 나타낸 것이다.

들은 당연히 씨앗을 심는 곳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들이 씨앗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곳에만 씨앗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를 보면 씨앗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풀이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씨앗을 시앗이 경음화된 것으로 본다면 시앗들>씨앗들>때앗들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시앗은 남편의 첩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치 시앗처럼 ‘특정한 곳에 끼어있는 들’이란 뜻은 아닐까? 좀 더 어원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해석으로 생각된다.

띠앗은 형제나 자매 사이의 우애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역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사이좋은 형제가 생각난다. 형은 동생 논에, 동생은 형 논에 볏단을 몰래 가져다 놓다 달빛아래서 서로를 확인하고 우애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띠앗들이라는 지명도 본래부터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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