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아는 목화에서 목화씨를 분리하는 도구이고, 멍에는 쟁기나 써레질 할 때 소의 목 위에 걸치는 연장이다. 지금은 소도 논밭에서 일을 시키지 않고 목화를 심어 길쌈을 하는 집도 없다. 용인의 경우 1950년대나 60년대 초까지 부분적으로 길쌈을 하는 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70년대 이후에는 경운기와 트랙터 보급으로 소도 더 이상 일소로서 역할은 하지 않게 됐다.

씨아는 직사각형의 나무토막을 바닥에 나란히 몸체로 하고 그 위에 2개의 기둥을 박은 다음, 그 윗부분에 롤러처럼 둥근 나무 2개를 맞물려 끼운다. 한쪽에는 기아 모양으로 맞물려 돌게 돼 있고 다른 한쪽에는 중간이 한 번 꺾인 손잡이를 끼운다. 오른손으로 씨아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돌아가는 둥근 가락 사이에 말린 목화송이를 넣으면 씨는 앞으로 떨어지고 목화솜만 뒤로 빠지게 돼 있다. 이때 씨아를 돌려주는 손잡이 부분을 씨아꼭재미라고 한다.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말이나 소의 목에 얹는 데, 가운데부터 양 옆으로 가벼운 경사를 이루며 차차 가늘어지다가 마지막에 턱을 만들어 마감했다. 이 부분에 쟁기나 써레, 마차의 밧줄을 맨다. 말이나 소는 어깨보다 목 부분이 약간 낮은데 멍에를 걸기에 편하다. 그래야만 소나 말이 끄는 힘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아꼭재미나 멍에는 대략 ‘V’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꺾이는 부분의 각도가 깊지 않고 매우 완만하다. 비유하면 ‘V’자 모양을 펼친 모양이라기보다 ‘ㅡ’자형 곧은 막대를 약간 꺾어놓은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편에 더 가깝다. 마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부메랑처럼 꺾였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에는 씨아꼭재미 능선이 있다. 마을 뒤편 가장 높은 봉우리인 노고봉에서 달봉 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으로 모양이 씨아의 손잡이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꼭재미는 손잡이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는데 꼬챙이의 변음으로 생각된다. 씨아의 손잡이가 나름대로 가늘고 길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슷한 지명으로 원삼면 죽능리 능안마을 동남쪽에 쌍꼬쟁이골이 있다. 여기서 꼬쟁이는 꼬챙이의 변음으로 보이는데, 마치 가늘고 긴 나무 꼬챙이처럼 생긴 골짜기가 나란히 두 개 있다는 뜻이다.

멍에는 논에 많이 나타나는데 모현면 왕산리와 포곡읍 신원리, 이동면 송전리와 화산리, 남사면 창리 등에 멍에배미가 있다. 이는 논이 길쭉하고 중간에 약간 꺾이는 경우 붙는 명칭이다. 논 모양이 멍에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장구배미도 논 모양이 장구를 닮아 가운데가 잘록하고 양 옆이 커다란 경우 붙는 명칭이다. 또 바지배미는 논 모양이 바지처럼 생겨 부르는 이름인데, 이런 예를 보면 멍에배미나 씨아꼭재미와 같은 땅이름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농촌의 일소는 멍에를 한번 지면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농우(農牛)는 고기보다 일을 시키는 게 더 큰 목적이었고 일년 사철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멍에에 빗대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가리켜 멍에를 진다고 했을까?

시대가 변하니 소의 역할도 변하고 더불어 멍에와 같은 도구도 소용이 없어졌다. 세월이 가면 경운기자리나 트랙터배미와 같은 논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온 들이 반듯하게 경지정리 돼 있는 지금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잔치가 있어 돼지를 잡으려고 했더니 돼지가 한마디 하더란다. “나보다는 더 일 않고 빈둥거리고 많이 먹는 저 소를 먼저 잡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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