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원이고개는 기흥구 보정동에 있는 고개이다. 마북동 한성CC 사거리에서 보정동 연원마을 삼거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본래 모습이 사라졌다.

보정동에 속한 마을 가운데 연원(蓮院)마을이 있는데 <내고장 용인 지명지지>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래가 실려 있다. ‘연원마을은 보정리에 속한 마을로 속칭 열원이라고도 한다.

본래 이 마을에 조선시대 역원(驛院)제도의 하나인 보시원(普施院)이 있던 곳이었으나 원(院, 여관, 여객이 묵는 객사)이 폐지된 후 오랜 세월이 경과됨으로써 유래가 변질돼 마을에 연못이 있었고, 또 연꽃이 만발해 연원이라 하였다(연혁대장)’고 하는 내용이다.

역원제도는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진 교통, 통신제도로 역(驛)은 말을 기르며 사람이나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다. 주로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에는 총 545개소의 역이 있었다. 용인에는 구흥역과 금령역, 좌찬역 등이 있었는데 금령역은 후에 김량역으로 이름이 달라진다. 

원(院)도 역과 마찬가지로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인데 조선시대에는 총 1310개소의 원이 있었다고 하며, 원(院)은 역(驛)과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 역은 주요 도로를 따라 30리마다 설치됐고, 원은 역과 역 사이에 설치되는데 보통이었다.

역(驛)은 공무 수행중인 관리에게 말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암행어사의 상징처럼 알려진 마패가 발을 빌릴 수 있는 증표였다. 따라서 마패는 지금으로 치면 관용차량 사용권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역과는 달리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들도 휴식 및 투숙처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원보다 역이 보다 공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용인현 역원조에는 보시원이 현 서쪽 십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후 <여지도서>나 각종 읍지류와 같은 기록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 대부분의 원이 폐지된 때문으로 보인다.

약 100년 전의 기록인 <조선지지자료>에는 서변면에 속한 마을로 보수원(寶樹院)이 있고 보수원마을에 주막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보수원은 보시원의 와전으로 가운데 있는 ‘-시(施)-’가 발음이 비슷한 ‘-수(樹)-’로 바뀐 것이다. 

또 고개 이름으로 연원현(蓮院峴)이 있는데 한글로 열원이고개라고 병기돼 있는데 보수원이 아닌 독정리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보수원이 변해서 연원이 됐다면 연원마을 이전의 이름, 즉 보수원에 있는 고개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는 아마도 보수원과 독정리 사이에 있는 고개여서 독정리에 속한 고개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지자료의 기록을 보면 열원이고개는 연원현임이 확실하다. 이는 연원고개>연원이고개>열원이고개로 변화된 결과인데 연원마을 역시 같은 변화를 거쳐 열원이라고 부르게 됐던 것이다.  

지금은 수지구 죽전과 기흥구 구성 일대의 개발로 인해 전통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을 이름은 아파트단지의 마을명으로 옮겨 갔다. 열원이고개 또한 넓어지고 아스팔트 도로가 되어 역사 속에 묻히고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는데 가히 상전벽해의 변화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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