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에 관한 설화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일제 때 우리 민족을 비하하기 위해 지어낸 설화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어디를 봐도 부모를 버리는 풍속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 제기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일제 초기에 만들어진 설화로 인식하고 있는데 도굴꾼들이 널리 퍼뜨렸다는 이야기는 특히 설득력이 있다. 비록 돌보는 이가 없다 해도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이 무덤은 고려장 터이기 때문에 파도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는 것이다. 부모를 내다버린 무덤이니 불효한 무덤이고, 그런 무덤은 파내도 괜찮다는 논리였을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의 기로국(棄老國) 설화에 나오는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와전돼 고려장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일제 때 한국인의 민족성을 나쁜 쪽으로 만들기 위해 고려장 설화를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고려장은 ‘고려+장’이다. 고려시대의 장례라는 뜻이다.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를 줄여서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려장은 고구려시대의 장례풍속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고구려시대나 고려시대 그 어느 때도 늙은 부모를 가져다 버리는 풍습은 없었다. 우리나라 역사서는 물론, 중국 사서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를 감안한다면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일제시대에 악의적으로 왜곡돼 전파된 것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인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명 가운데 고려장과 관련된 곳이 적지 않다.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에 고려장터와 고려박골이, 처인구 삼가동에 고린장골이 있으며 모현면 왕산리에도 고래뎅이라는 지명이 있다.

죽능리의 경우 고려장터라 했으니 고려장을 했던 터가 확실하다. 다만 고려박골은 뒤에 ‘-박골’이 있어 고려장을 했던 곳인지 아닌지 잘 알기 어렵다. 고린장골은 고려장골의 와전이다. 고려장이 비슷한 고린장으로 바뀐 것인데 이런 예는 다른 고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래뎅이도 고려장의 와전으로 보이지만 고려장과 관련이 있는 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밭고랑을 밭고래라고 하듯이 고려장의 변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뎅이는 덩어리진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밭고랑이 뭉쳐있는, 모여 있는 둔덕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남사면 완장리에도 고려장터가 있다. 산기슭을 올라가면 옛날 고분이 있는데, 봉분이 사라지고 무덤내부가 드러나 있다. 무덤 내부의 관은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안의 부장품은 이미 도굴돼 남아있지 않다.

필자가 어렸을 때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어머님이 고향인 백암에서 학교 다닐 때 어른들이 고려장터라고 하던 곳에 아이들과 가보면 우묵하게 패인 곳에 그릇 몇 개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역시 무덤 터를 고려장터라고 부르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해 전 백암면 근삼리 내수곡마을 위에 있는 광제사에 갔을 때도 절 근처에 고려장터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남사면 완장리처럼 노출된 무덤터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감안해 보면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래된 무덤이나 그 흔적을 통 털어 고려장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장터는 부모를 버렸다는 고려장터가 아니라 오래된 무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런 버려진 고총(古塚)들이 민간에 널리 알려진 부모를 버린다는 설화와 결부돼 고려장터의 유래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오는 것을 보면 악의적인 왜곡이 의외로 오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지명 유래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라 하겠지만 없어질 때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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