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프랑스 탐험가이자 학자인 샤를 바라가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급격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샤를 바라 고양이 그림.
샤를 바라 고양이 그림.

샤를 바라는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방문하는 서구인들과 달리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서 부산까지 내륙을 횡단하기로 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전염병으로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선의 진짜 모습을 보기로 한 샤를 바라는 과감하게 일정을 진행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강을 건너고 도시를 지나갔다.

샤를 바라는 자신의 여행 기록을 자세하게 남겨 놓았다. 그들이 대구를 지나 청도에 도착했을 때였다. 높고 잘 지어진 성이 있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샤를 바라 일행이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도 사람이 사는 기척도 없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사는 성처럼 조용했다.

일행이 반대편 성문으로 지나갈 때까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웃 마을에 도착해서야 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염병 때문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가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집을 버리고 모두 피신한 것이다.

그는 당시 조선의 대문에 붙어있던 그림 한 장을 서구에 소개했다. 고양이 그림이다. 콜레라가 쥐로 인해 전파된다는 믿음으로 쥐가 무서워하는 고양이 그림을 붙여두면 전염병이 예방될 것이라는 생각에 붙여놓은 것이다.

이런 미신과 같은 전염병 예방법을 하나 더 기록하고 있는데, 외국인 입장에서 아주 기이한 광경이었다. 병자가 발생한 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북을 치면서 한 명이 춤을 추는 행위였다. 바로 굿이다.

당시 조선의 한의학적 치료 방법으로 콜레라를 극복할 수 없다는 벽에 부딪힌 민중은 미신이나 주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간혹 그런 행위로 회복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기한 경험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된다. 고대 의학에 주술적인 내용이 들어간 이유다.

이런 특별한 치료 경험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치료 방법이 난립했고, 경우에 따라서 폐기됐다. 1578년 중국 명나라 이시진은 전해 내려오던 치료 방법에 수많은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정리해서 <본초강목>을 편찬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경험은 한계가 있고,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이어나가는 가업처럼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학지식을 책으로 만들어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순하게 글을 읽어서 환자 치료에 나서기 쉽지 않았다. 국가가 교육기관을 만들어 의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삼국시대 신라는 ‘의학’, 고려도 학원과 같은 의과 교육기관이 있었다.

서구도 동양과 비슷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의학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많은 제자를 교육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내용 중 하나가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을 부모처럼 여긴다”라는 구절이다. 의학을 가르쳐 준 스승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묘사한 내용이다. 의학교육은 지식적인 내용보다 치료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특히 정확한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회복되는지 아니면 악화되는지 다양한 증상을 관찰하면서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잘못 알려진 속담의 원 뜻은 의학교육이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기독교 중심의 중세 서구에서는 의료기관이 환자의 치료보다 가난하고 아픈 병자를 돌보는 봉사의 성격이 강했다. 의학교육은 수도원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실험이나 실습보다 교과서를 낭독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일부 의사들은 활자 중심의 교육에 한계를 느끼고 직접 실험에 나서기도 했으나 의학교육의 개혁이 일어난 것은 르네상스 이후였다.

르네상스 이후 대학과 의사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의학교육이 이뤄졌다. 대학은 학문적 교양을 중시했고 임상 실습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반면 의사들의 모임은 실제 환자를 얼마나 잘 진료하는지가 중요했다. 치료가 잘된 환자는 의사들에게 진료비를 지급했다. 의사의 수입은 자신의 진료 역량에 달려 있었기에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 고난도 시술의 경우 숙련된 전문적인 의사가 수행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의사들의 독점적인 모임들이 해체되면서 의과대학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문 중심의 교육은 실제 의사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의료기관에서 임상 실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8세기 의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독일에서 의과대학 졸업 후 임상 실습 과정 참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뛰어나고 명성이 높은 교수의 제자가 돼 연구와 진료를 이어가는 일종의 도제 방식이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의 경우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임상 실습을 하기 위해 찾아갈 만한 교수들이 많지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 북미 대륙으로 이동이 막 시작되는 상황으로 과학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있던 상황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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