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있던 조선의 인조는 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에는 높은 단 위에는 청나라 태종이 앉아 있었고,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이어졌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는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달하는 빠른 진격으로 조선의 허를 찔렀다. 임경업 등 수많은 조선의 장군들은 산성에 있었으나, 청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바로 조선의 수도로 진격한 것이다. 인조는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47일간 농성했으나, 결국 추위와 식량난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한반도 정부가 외세에 의해 굴욕적으로 항복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몽골의 침략 시기 강화도에서 버티던 고려는 투항했으나 상황은 좀 달랐다. 당시 몽골은 몽케 칸의 사망 이후 후계자 분쟁이 벌어져 몽골 초원의 아리크부카와 중원 화북의 쿠빌라이가 다투고 있었다.

몽골 귀족의 지지로 대칸을 선언한 아리크부카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의 쿠빌라이는 군사력에서 앞서고 있었다. 고려 태자였던 원종은 몽골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의 방문에 뛸듯이 기뻐하며 수십 년간 성공하지 못했던 고려의 복속을 자신이 완성해 큰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어서 몽골의 대칸이 되었다. 쿠빌라이의 특별한 약속으로 고려는 몽골에 점령된 국가 중 유일하게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삼전도의 굴욕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막다른 상황에 몰리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이었다. 특히 한 차원 낮은 수준으로 얕보았던 청나라에 굴복한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과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한산성의 패배는 조선의 정치, 문화뿐 아니라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마과회통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마과회통

중국은 서양 각국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과학문물이 전파되었고, 조선은 중국을 통해 다른 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수입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사대교린’이라는 명분으로 이뤄진 일련의 국제적 환경은 활발한 교류가 가능했다. 그러나 청이 중국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교류는 이어졌지만 거부감도 함께 있었다. 서구의 과학 문물을 들고 돌아왔던 소현세자는 인조의 박대를 받았다. 심지어 귀국한 지 세 달 만에 의문을 남긴 채 병사했다. 과학뿐 아니라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는 고립돼 점차 명분을 추구하면서 독자적으로 변모했고, 의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명나라를 통해 수입되던 중국의 의서들은 조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고, 허준의 동의보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 치료에 관련된 의사가 들어왔지만 국가 의학의 표준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18세기 산업혁명과 과학 기계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서구 의학은 실크로드와 해상 무역을 통해 청나라에 전해지고 있었다. 1800년 제너에 의해 개발된 종두법은 불과 20년 만에 청나라를 거쳐서 조선에 전해졌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마과회통> 마지막 부분에 서역으로부터 전해진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했다.

그러나 서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던 시절이고, 정약용 자신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중이었기에 서양에 대한 내용은 후세들에 의해서 삭제된 흔적이 남아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이 이뤄지면서 서양인 선교사 등을 통한 서구의 의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외과적 처치로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구하기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정부도 서구의 의학으로 의료진 양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병합이 이뤄지면서 좌절되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고급 학문을 전수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의학도 그중 하나로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 전통의학을 시행하던 의료인 수만 명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의사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조선은 소수의 의사들만 양성하고 지방은 전통의사들을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었으나, 의사와 의생으로 이원화된 의료체계를 다시 하나로 만들지 못했다.

미군정은 당연히 단일 의료체계 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전통의학을 고수하던 의생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극도의 혼란 속에 1951년 9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의생을 한의사(漢醫師)로 변경하는 내용이 포함된 국민의료법이 제정됐다.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한의과대학 폐지 등 강력한 정책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해당 분야의 강력한 저항으로 다시 유지되었다. 이어 1986년 한의사의 한자를 ‘漢’에서 ‘韓’으로 바꾸는 법이 통과되었다.

삼전도의 굴욕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의료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국가의 정보원으로서 중요한 중국과의 교류가 제한되면서 의학의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뒤이어 전해졌던 서양의학도 천주교 탄압과 맞물리면서 발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동훈 원장
이동훈 원장

일제 식민지배 영향으로 환자를 치료하던 전통의학에서 현미경 등으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는 현대의학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지 않아 우리나라는 의학이 둘로 나눠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1945년 대한민국은 다시 빛을 찾았지만,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들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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