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원장
이동훈 원장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부에서 말 한 마리가 사라졌다. 귀중한 재산인 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이웃 사람들이 위로했다. 정작 말을 잃어버린 당사자는 “이 일이 도리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면서 태연했다.

정말 얼마 뒤 사라졌던 말은 다른 말들과 함께 돌아왔다. 좋은 말을 공짜로 얻은 셈이니 주변 사람들이 와서 축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이것이 오히려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하면서 덤덤했다.

새로운 말을 시험 삼아 타보던 아들이 낙마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다. 아들은 다리를 절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아들의 부상을 위로했다. 말 주인은 이번에도 태연하게 “이번 상황이 또 복으로 바뀔 수도 있겠지요” 하면서 태연해했다. 얼마 뒤 전쟁이 터지고 젊은 사람들은 병사로 징집되었으나 다리가 불편한 아들은 동원되지 않았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라는 고사다.

새옹지마에서 병사 징집 시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제외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전투에 나가는 젊은이들의 기본적인 신체 상태를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와 달리 무기를 들고 직접 육체적인 부딪힘이 많은 근세 이전에 병사들의 건강은 매우 중요했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는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전투를 시작하기는커녕 작전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군대가 흩어지거나 철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세 이전까지 병사를 선발하는 데 간단한 신체검사를 제외한 일반 국민의 건강 상태를 정기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일부 귀족이나 왕의 경우 전담 의료진을 확보해 정기 검진을 실시했다. 특히 조선의 경우 <태의원일기>를 참고하면 5일마다 왕의 몸 상태, 수면 상황, 식욕을 서면으로 묻고 왕이 답하는 형태였다. 일종의 비대면 진료 형태다.

비대면 진료가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의 왕 스스로 상당한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유교 경전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의학 공부도 했는데, 병자를 잘 치료하는 것도 관료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부 국왕은 의관의 지시보다 스스로 판단해서 약재를 조합해 치료에 나서기도 했기에 의관이 직접 왕을 진찰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서구의 상황도 비슷했다. 특히 병인을 명확하게 모르고 치료 방법도 확립되기 이전에는 진료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아 질병을 미리 발견하는 조기 검진은 생각하기도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치료 방법의 오류가 수정되면서 회복되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현미경의 발견으로 병을 일으키는 결핵균 등의 세균이 발견되었다. 세균이 몸에 침투하면서 바뀌는 몸 상태를 미리 확인하면 조기 치료가 가능하고, 예후도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했다.

1861년 영국의 의사 호레이스 도벨은 결핵 환자를 오랜 기간 치료하면서 진찰, 신체검사, 실험실 검사를 통해 사소한 이상을 미리 발견한다면 치료에 도움이 되므로 정기 검진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뢴트겐에 의해서 엑스선이 발견되면서 결핵과 같은 폐의 세균 감염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1915년 미국 결핵협회는 모든 사람에게 매년 정기 검진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 정기 검진을 개인이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비용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세기 미국 사회에서는 생명보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었다. 인디언과의 충돌, 남북전쟁 등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경우 남겨진 가족을 위한 경제적 지원 방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보험회사들은 보험 가입자들이 오래 생존할수록 수익이 더 발생하기에 당연히 건강 상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의 자문을 얻은 보험회사는 보험 가입자들에게 정기 검진을 실시했다. 초기 연구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검진을 실시한 사람의 경우 5년 이상 추적한 결과 사망률이 28%나 줄었다. 특히 40세에서 60세 사회적 활동이 활발한 연령대에서 큰 효과가 나타났다. 젊은 층의 사망을 감소시켜 보험료를 내는 사람이 증가해 결과적으로 보험회사에 큰 이익이 되었다. 국민은 건강을 지켜서 좋고 보험회사는 돈을 벌어서 좋게 된 것이다.

보험회사뿐 아니라 기업체도 건강검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건강한 직원이 열심히 일하면 생산성이 더 높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920년대부터 미국 민간기업에서 건강검진이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정기적 건강검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자 미국 의학협회는 1922년 정기건강검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서 정부와 함께 “생일날 건강검진을 받읍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 과정에서 발달된 정밀 계측기구와 새로운 의료기기의 개발은 검진의 질적 수준을 높여주었다. 내시경의 개발은 위암과 대장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초음파 검사는 간암과 여성 질환 진단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일부 기생충, 결핵 검사 등이 강제로 시행되다가 광복 이후 1950년대부터 학생을 중심으로 신체검사와 기생충, 결핵 검사 등이 시작되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되면서 일부 사업 근로자를 대상으로 정기건강검진이 1970년대 이후 전 사업장으로 확대되었다. 1977년 시작된 의료보험은 2000년 국민건강보험으로 통합되면서 전국적인 건강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의 경우 비급여를 포함해서 건강검진으로 지출되는 비용은 2015년 기준으로 1인당 17만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수백만원이 넘는 미국을 비롯한 일본, 영국의 검진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상태다. 해외에서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올 정도로 질적 수준도 높은 편이다. 정확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체적인 의료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건강검진으로 치명적인 악성 종양도 조기에 발견해 완치되면서 건강한 삶의 연장이 가능해졌다. 최근 코로나19로 내시경 검사가 지연되고 있다. 건강검진을 실시해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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