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감시와 신고 대상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근거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았다. 울산성에서 고립돼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던 경험을 살려 곳곳에 식용이 가능한 조롱박이나 은행나무, 소나무, 토란을 심었다. 식수를 위해 우물을 120개나 만들었다. 성문이 29개나 있고, 망루가 49개, 높은 누각을 가진 천수각이 3개나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심혈을 기울여 축성한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천재지변 앞에 무력했다. 수많은 지진속에 곳곳이 무너지고 다시 수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1877년 구마모토성을 둘러싼 군대가 나타났다.

1919년 인천에서 칼을 찬 위생경찰이 콜레라 유행지역 마을 입구 교통을 통제하는 모습. 사진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비평사)
1919년 인천에서 칼을 찬 위생경찰이 콜레라 유행지역 마을 입구 교통을 통제하는 모습. 사진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비평사)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나타나자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무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쇄국과 개항 속의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막부가 무너지고 국왕 중심 체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지방 무사들은 불만세력으로 변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서남부 지역 규슈의 사스마 지역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 1만4000여명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했다. 총과 화포로 무장했고 직업 군인 출신의 우수한 병사들로 구성돼 정부군보다 3배나 많은 반란군은 쉽게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구마모토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일본, 1874년 의료제도 정비

일본 서남부 지역의 반란에 동원되었던 중앙 정부군은 전투가 끝난 뒤 원래 주둔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개인 위생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터가 된 규슈 지역에서 콜레라가 유행했다. 콜레라는 귀환하는 병사들을 통해 일본 전국으로 확산했다.

1879년 일본에서 16만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0만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1874년 의료제도를 정비하면서 발진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홍역 등 4가지를 악성 전염병으로 규정했다. 이외에도 성홍열, 백일해, 이질 등 7가지 병을 진료한 의사는 환자가 사망할 경우 3일, 늦어도 7일 이내 정부에 보고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1877년 일본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일본 정부는 의사, 경찰, 공무원을 위원으로 검역을 실시하고, 환자를 지정병원에서 격리, 치료했다. 매일 환자를 파악해 보고하도록 하고 환자와 가족은 외출할 수 없게 했다. 격리는 강제력이 필요했기에 경찰 권한이 점차 강해졌고, 위생경찰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1880년 일본은 콜레라 이외에도 다른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전염병예방규칙을 만들었고 여기에서 최초로 ‘방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의사와 경찰, 공무원 조직이 만들어졌으나 조선의 상황은 달랐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을 택한 조선에도 콜레라가 유행했다. 그 이전에도 콜레라가 있었지만 세균에 의해 발생된다는 정보가 소개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방역이 시도되었다. 일본의 전염병 예방규칙을 모방해서 1899년 조선에서도 전염병 예방규칙이 만들어졌다. 천연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디프테리아 등이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질병을 진료할 의사도 강제 격리를 집행할 경찰력도 부족한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와 내정 권한을 빼앗고 경찰력을 장악했다. 일제는 경무국이라는 경찰 조직을 만들고 그 아래 위생과를 설치해 전염병, 예방, 위생, 의료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의료행정이 보건부서가 아닌 경찰 조직에 의해 기형적 형태로 시작된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 기간 동안 위생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방역활동과 급수시설, 식당 등이 단속되었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도 있었으나 의료 전문가들이 배제된 일방적인 단속과 처벌 위주의 강압적 정책은 민중의 반감으로 이어졌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의사들은 환자를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경찰 중심의 방역활동은 검역을 명분으로 호구조사를 하거나 교통을 차단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문인력인 의사가 진료와 의학적 방침을 결정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권한을 행사하며 경찰조직은 보조적 업무를 담당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일제, 경찰 조직 동원 전염병 감시

일제는 경찰조직을 동원해 주민을 감시하고 발병시 신고하도록 했다. 일제시대 위생경찰들은 전문지식이 부족해 규정대로만 방역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시행착오가 생기면서 민간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현대의학과 같은 고급 학문의 전수를 꺼렸던 일제는 조선인 의사 양성에 소극적이었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민간 의료기관들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해 각종 규제를 가했다. 병원 건설 준공일이나 완공일을 어겼을 때 설립 허가를 취소하는 것은 물론, 감염병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병실 현황이나 격리시설, 심지어 계단 수와 폭의 길이가 기준과 달라도 문을 닫게 했다.

일제는 민간 의료기관을 억압하는 한편, 각 시·도에 설치한 공립병원을 중심으로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공공의료기관이 민간의료기관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 전쟁 직후 전염병 예방법 제정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고 미군정이 실시됐다. 미군정은 경찰 조직으로 운영되던 보건업무를 일반행정부서로 전환했다. 보건후생국이 설치되었다. 1954년 전염병 예방법을 제정해 1종 콜레라·페스트 등 12개, 2종 백일해·말라리아 등 7개, 3종은 결핵·성병·나병으로 지정했다.

1종은 긴급한 격리가 필요한 질환, 2중은 보고가 필요한 질환, 3종은 관리가 필요한 질환으로 규정했고, 1957년 위생업무를 보건사회부로 이관했다. 행정부서로 이관되었지만 단속과 처벌 위주의 보건행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한국에도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환자를 발견해서 진단을 한 의료진이 신고를 하고 보건당국은 확진자와 접촉자를 격리시켰다. 접촉자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일련의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현재도 코로나19에 확진되면 의료진이 신고를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발견해서 보건당국이 상황 파악이 필요한 내용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신고하는 것이다. 보건의료기관과 국민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만이 정부의 역할은 아니다. 특히 공공과 민간의 차별은 불필요하다. 공공, 민간 모두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동일하다. 차별 없는 공평한 투자와 지원을 통해 발전하면 지역 주민들은 보다 좋은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경제가 발전하도록 지자체에서 여러 정책을 펼치는 것처럼 지역의료기관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지원해 시민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지방 정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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