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많은 화가들을 되짚어 공부하고 있다. 반도 나열하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훌륭한 화가들이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의 첫 번째 연인이자, 영원한 스승이며, 멘토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고흐. 인생의 근원적인 고뇌를 많이 표현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사는 농부들의 생활과 거친 터치로 생명력 있는 꽃그림을 그려내어 더욱 좋아한다. 해바라기, 아몬드꽃, 붓꽃(아이리스) 등등. 그의 꽃 그림들은 춤추고 노래한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람과 잘 익은 옥수수, 황금들판 해바라기 등 희망을 상징하는 색을 많이 썼던 고흐가 유
몇 년 전 죽어버린 흰 모란을 애달파하며 그렸던 이 그림은 모란을 사랑하는 주인을 만나 멀리 밀양으로 시집갔다. 몇 년 전 꽃밭에 물을 주며 문득 흰 모란은 고매(高邁)하고, 붉은 모란은 자유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고매함도, 자유로움도 사랑하는 관계로 붉은 모란 옆에 커다란 흰 모란을 비싼 몸값 주고 사다 심었는데, 이듬해 시원찮게 싹이 트더니 꽃을 피우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거름을 주고 물도 주었으나 죽고 말았다. 아마도 보리수 그늘 아래 심어서 그랬나 싶기도 한데, 붉은 모란은 같은 자리에서 씩씩하게 잘도 자랐다.
오~ 빛나는 봄이여! 잃어버린 봄이여. 온갖 아름다움의 대명사들이 유혹하는 저 들이여. 계곡이며 산과 강이여. 나는 지금 밧줄에 몸이 묶여 정박해 있는 배와 같도다. 은빛 물결 유혹하고 먹이로 충만한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그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정박. 꽃향기를 맡으며 환희로 마음 설레던 시간도 기억해본다. 달콤했던 파스텔톤의 꽃노래, 새들의 지저귐, 여기저기 움트던 대지의 박동소리를 그저 먼 발치에서 관조하듯 바라볼 뿐이다. 화폭에 물감을 풀어 번지는 느낌에 짜릿했던 것도 내가 봄의 주인이었을 때 가능했던 것 같다. ‘난 잘 할 수
꽃 폭죽이 터졌다. 여기저기 자연이라는 대지 위에 향기 섞인 온갖 물감을 풀어 옥매, 백매, 청매, 만첩홍매를 피워냈고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봄의 전령사가 되었으니 그 꽃대궐 속을 천천히 걸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간 광양의 섬진강변은 나를 가장 찬란한 시간 속으로 인도한다. 그래… 꽃도 피어날 때 만나야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희망의 가교 위를 꽃물 들이며 산책한다. 발 아래 자잘한 봄까치꽃, 눈을 들면 매화나무 뒤로 시야를 흐려놓는 황금빛 산수유꽃, 옅은 레몬 옐로우빛의 히
눈뜨는 순간부터 TV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와 감염 전파 등의 내용으로 요란하다. 새벽 내내 그림을 그리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둠을 뚫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긴 어둠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오는구나! 이 두렵고도 암흑같은 ‘코로나19’의 확산도 여기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땅에 봄은 오는가? 저 산 너머 아득히 희망은 오는가? 온 나라가 두려움에 휩싸이고 아득한 안개 속에 휩싸인 기분이다. 작은 화폭 위에 꽃을 그리며 세상의 전쟁 같은 아우성을 잊으려 애써본다. 굽어도 휘어지지 않는 소나무처럼 지
무채색의 겨울이 말을 한다.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이틀 동안의 여행을 통해 또 깨닫는다. 강릉 만항재 태백 삼척, 그리고 긴 동강을 드라이브하면서 수많은 잎을 떨군 빈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강의 언어, 바람의 언어, 시린 강물의 언어를 듣는다. 심지어 빈가지가 품고 있는 봄을 본다. 겨울을 싫어했었다. 무채색이고 춥고 움추러들게 해서. 이제 조금씩 겨울의 깊은 속내를 깨닫게 됐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여도 땅속 깊이 속마음을 감춰두고 햇살 좋은 어느 봄날 팡팡팡 향기로운 꽃으로 터뜨리리란 것도.동강
중간중간 밥 먹고 커피 마신 것 빼면 꼬박 10시간을 작업했다. 사색, 혹은 명상하다. 올해 내 그림의 테마는 ‘관조(contemplate)하다’이다. 관조(觀照)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본다는 뜻이기도 하고, 주의 깊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철학 용어이기도 하다.3월 동경전시회와 인사동 전시회 그리고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그림이 있어 꼼짝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짙은 밤의 시간을 붓으로 가르고 물들이다 보니 보는 그 누구도 눈 멀게 만드는 우리 전통 색감과 매혹의 꽃들이 감성의 불꽃을 지피게 한다. 잡물이
새날이 밝았다. 인도에서 오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전시회가 있으니 새벽부터 그리고 있다. 한기가 느껴지는 한겨울 새벽은 고요하다. 새 신을 신은 것처럼 설레면서도 조심스럽다. 창가에는 말라 있는 산수유를 따 먹으러 아침마다 새들이 온다. 그중 새 한 마리는 유리창이 허공인줄 알고 부리로 노크하듯 유리를 쪼아댄다. 그림을 그리는 내 뒷모습이 아마도 허수아비쯤으로 보이나 보다. ‘톡톡톡톡톡…’ 계속 쪼아 대다가 뒤돌아보면 후르륵 날아간다.그 새 덕분에 창밖을 한 번 더 내다 본다. 봄을 품고 있는 빈 나
유년시절 우리 집 뒤뜰에는 황토로 만든 아궁이와 빨래를 삶는 솥이 따로 있었다. 하얀 옥양목 이불천을 감당할 수 없었던 엄마는 크고 가벼운 솥에 이불홑청을 벗겨 양잿물을 넣어 하얗게 삶은 후 볕 좋은 마당에 널곤했다. 명주 치마저고리까지 함께 널어 놓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었지!오늘 나는 그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은 툇마루에 앉아 눈부시게 빛나는 꽃들의 향연과 연둣빛 고운 새순을 보면서 흰색은 주변색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깨닫던 날, 나는 마당 끝으로 달려가 흰 홑청을 들여다 보았다. 눈이 아른아른한게 아지랑이
겨울비가 내린다. 겨울은 깊고 온 누리는 메마른 무채색으로 뒤덮여 있으니 약동하는 생명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어서 붓질을 시작한다. 모색과 사색의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꼭 이 겨울처럼 요원하기만 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속도처럼 느리게 느리게 창작의 끄나풀을 잡아당겨 큰 제비고깔과 작약을 배치해 그려 보았다.땅속 깊은 곳에서 봄을 준비하는 형형색색의 향기와 봄의 여린 새싹이 있음을 눈치챌 수 없으니, 이 겨울날 나는 영혼의 심연 속에서 숨 쉬는 창조의 꿈틀거림을 살포시 끄집어내어 펼쳐 놓는다. 이 색감이, 향
오랜만에 붓꽃을 그렸다. 수국과 모란 구절초 목련 등등 화려한 꽃들의 세계를 그리다가 스산한 한기가 도는 이 계절에 붓으로 봄꽃을 그리며 반기를 든 것이다. 겨울도 계절인데, 그것도 이제 시작인데 밖에 나서면 온 누리에 퍼져있는 싸한 공기와 얼어있는 자연의 빛깔을 보며 몇 개월 버티며 살아야 하니 마음 안만이라도 온기를 채우기 위해 화폭 위에 봄꽃 향기를 퍼뜨려 보는 것이다.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면 진초록의 절도있는 꽃잎이 삐죽삐죽 솟아나 물 머금은 붓끝처럼 꽃망울을 맺었다가 ‘팡’ 하고 터지는 희망의 꽃. 창을 뒤흔드는 이 겨울
난 요즘 백일홍을 그리고 있다. 지금 나의 뜰에는 백일홍과 피라칸다가 씩씩하게 초겨울의 뜨락을 지키고 있다. 초봄에 옆집 아주머니가 씨앗을 주기에 여기저기 무심코 뿌린 씨앗이 이렇게 화려한 빛깔로 근위병 노릇을 할 줄이야!온갖 꽃들이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던 뜨락에는 이제 낙엽이 주인이 됐다. 매일 쓸어 낸다. 하루에 두 번도 쓴다. 그냥 두고 ‘구르몽’의 시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일주일에 백여 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이 들고나니 밟힌 낙엽이 어찌나 지저분한지 쓸고 또 쓸어 낸다. 이제 쓸쓸하게도 빈 가지만 남기 시작하네! 그러
밤새 내린 모진 비바람에 뜨락의 가을꽃들이 사방으로 쓰러졌고, 연꽃 떨군 자리에 단풍든 연잎들이 물속으로 침잠하고 있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개미취 산비장이 꽃무릇 구절초 앞을 다퉈 피고 지고, 백일홍과 코스모스도 당당히 한몫하는 계절이다. 꽃은 소리없이 피고 지기에 그 향기와 모습들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 같다. 가을볕 아래서 흔들리는 꽃들의 유혹을 보며 로댕의 말을 떠올린다. “예술가는 자연과 막역한 친구 사이다. 꽃들은 줄기의 우아한 곡선과 꽃잎의 각기 다른 미묘한 색의 조화를 통해 예술가와 대화를 나눈다”
가을날이 속절없이 깊어 간다. 바람이 주고 간 사랑으로 붉은빛으로 물든 사과나무의 열매들을 모두 거둬 들이는 계절이다. 꽃집에 가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란타나 세 그루를 샀다. 아기별꽃들이 모여 한 개의 꽃덩어리를 이룬 듯 아름답지만 달콤한 듯 톡 쏘는 그 향기는 은근한 독을 품고 있다고 들었다. 키가 제법 큰 것들로 샀다. 사실 외래종은 거의 사거나 심지 않지만 몇년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부를 트레킹할 때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어디선가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뒤돌아보면 족히 3m는 되는 각양각색의 란타나꽃들이 방실방실
산목련을 그립니다. 유년시절 작은 우리집 옆에 구중궁궐 같던 기와집이 있었고, 그 너른 뜨락에 우아하게 피어있던 함박꽃나무(산목련)를 그리는 것이지요. 그 기품있는 꽃은 나비와 햇살과 바람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내 기억의 조각 한편에 향기로 남아있습니다. 창문 밖 햇살의 유혹을 못 본 척하며 어제오늘 그림이라는 바다에 푹 잠겨 헤엄치며 산목련과 옅은 핑크의 풀협죽도와 구절초를 배치하고 기억 속 시간은 조각보로 표현합니다.아~ 그 봄날 꽃과 늦은 여름날의 꽃, 그리고 늦가을 꽃이 조각보 위에서 만납니다. 파스텔톤의 조각보를 분할하고 채
엉겅퀴를 그리고 있다. 가을이 되니 유년의 그리움들이 기억창고의 뚜껑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엉겅퀴 꽃잎이 추억 속으로 날아오른다. 연둣빛 벼 이삭이 너른 들판에 가득할 때 조뱅이 지칭개 엉겅퀴 등이 좁은 농로에 지천이었다. 그 논둑 사이로 언니 오빠 여동생과 걸으며 봄이면 꽃을 따 소꿉놀이를 했고,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아 볏줄기에 끼우며 놀았던 생각이 난다. 동네 어귀에서 언니 여동생과 고무줄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고, 오빠들은 그 옆에서 구슬치기와 자치기를 하기도 했었지.가끔 아버지의 퉁소 소리 혹은 기
마음 복잡한 사람은 한여름에도 삭풍이 불고, 긍정적인 사람은 한겨울에도 새싹이 돋는다고 했던가. 외출에서 돌아와 정원을 살펴보니 무슨 벌레가 그랬는지, 불두화 잎을 온통 갉아 먹어 삭막한 가지만 남아있다. 작년엔 벌개미취를 초토화시키더니 올해에는 또 다른 꽃을 해하다니 괘씸한….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속상한 마음에 우산을 쓰고 뜨락을 서성이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명자와 아까시 떨기 작살나무 등이 잦은 비에 너무 무성하기에 전지해주고, 무작위로 퍼지는 금불초 인동 데이지 벌개미취 꽃범의꼬리 등은 많이 솎아냈다. 비가
그림을 그리다가 지루해 목백일홍을 감상하러 잠시 나섰다. 유난히도 붉게 핀, 작열하는 여름. 전지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손수레에 콩을 한가득 싣고 지나가고 계셨다. 이 뜨거운 태양이 콩을 여물게 했구나! “꺄~ 콩 많이 따셨네요. 장날 사러 나갔더니 얼마 없던데”했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바구니 가득 담아 주신다.” “까서 드셔유”하면서.“안돼요. 제가 살게요” 했더니 “난 돈은 필요 없구유, 쪼기 화분 하나만 주면 좋겠는데” 하신다. 할머니는 건너편에 세 들어 사시는데 꽃을 엄청 좋아하신다. “네네~ 드릴게요”하면서동양란
뜨락을 거닐었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무던한 희생을 요구한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산수국과 말발도리, 란타나 등에 두 시간 동안 듬뿍듬뿍 물을 주었음에도 호미로 땅을 파보니 푸석푸석한 흙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와중에도 수국이 피고 모감주꽃 진 자리에 꽈리 열매 같은 모감주 열매가 복주머니처럼 가득 매달려 있다. 태양의 정기를 받은 해당화 열매도 꽃인듯 붉디붉다. 여름은 이렇게 또 다른 색깔로 물들어간다.
오늘은 일층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며 완벽하게 몰두해 그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그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온갖 잡다한 생각과 온갖 상념을 한짐 심장에 얹은 채 붓은 화폭 위를 헤엄칠 때도 있다. 일층 갤러리에서 내다보면 초록의 꽃잎들 위에 푸른 별이 한가득 내려앉아 있다. 총총총 박혀 있다. 산수국이 푸른 은하수가 되어 물결친다. 30분 그리고 5분 내다보고, 또 30분 그리고 5분 내다보면서 완전히 몰두하진 못했지만 즐기며 작업을 한 날이다. 6월이 지나면 져버릴 산수국. 간간이 그꽃을 내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