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후손이 들려주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2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7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불행하면서도 의미 있는 해였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일제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했다. 군대마저 해산되자 조선 각지에서 울분을 토해내며 일제와 전면전을 치르는 의병전쟁이 본격화 됐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인 1919년 역시 우리 근대 역사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한 해였다.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만세운동, 그리고 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무장투쟁으로 완전히 전환된 것이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인의 안위를 뒤로한 채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살다간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후손들로부터 듣는 특집을 마련했다. /편집자

의병활동 가슴 속에 묻고 스러져간 최삼현 지사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촬영한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이 최완영 씨다.

외침이 있을 때마다 용인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움직임이 컸던 사실은 사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 몽골군에 맞서 부곡민과 함께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 승장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 여러 차례에 걸친 의병봉기 역시 마찬가지다.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출신의 오인수, 양지면 평창리 무관집안 출신의 임경재, 모현면 능원리 농민 출신 의병장 이익삼 등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수많은 의병들도 적지 않다. 일부 유력 의병장의 활동만 부각됐을 뿐 이를 모를 의병들에 대한 자료발굴이나 진상규명은 드물기 때문이다. 의병으로 활동하다 용인에 뿌리를 내린 최삼현(1890~1953) 지사도 잊혀진 의병 중 한사람이다. 전주 최씨 족보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병 최삼현(崔三顯)이 태어난 곳은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잔갈, 일명 ‘흐느실’이라는 마을이다. 1890년 아버지 재천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손이 귀한 유력 집안의 5대 독자였던 만큼, 집안과 문중의 많은 관심과 기대가 컸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최 지사의 친척과 해방 후 그와 절친했던 박순종씨(?~2002) 등에 의하면 5년여 간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 지사의 5남 완영씨에 의하면 “박순종씨는 ‘우리 의병 대장이 허이(위)대장이었다’고 말했다”고 밝혀 의병 허위부대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허위(1885~1908)는 당시 의병의 ‘별’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경북 선산 출신으로 충추원 의관, 평리원 수석 판사를 역임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을 거병해, 큰 전과를 올린 의병장이다.

그의 행적이 확인되는 것은 고향에서다. 일본 헌병에 쫓긴 그는 음성의 한 마을에 숨어들었다. 최완영(81)씨에 따르면 “음성군 맹동면에 살던 박순종씨는 일본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해꼬지를 하셨대. 일본군에 쫓겨다니다 우리 집에 오셨어. 그래서 광 안 빈 독을 엎어놓고 숨겨 드렸지. 거기서 무려 다섯 달이나 사셨는데,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 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어디론가 가셨대”라고 여러 차례 최씨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부친의 원을 풀기 위해 의병임을 알리는 비를 세운 최삼현 의병의 5남 최완영씨.

“그 분은 술만 드시면 아버지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부친께서 의병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생전에는 의병활동에 대한 말씀이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의 원을 풀어주는 게 자식된 도리이자 의무라는 최완영씨의 얘기다.

몇 해에 걸친 오랜 도피생활 끝에 최 지사가 동료 2명과 함께 마지막으로 숨어 든 곳이 바로 용인이었다. 허위 의병부대에 참전한지 5년여 만인 1912년이다. 그는 좌전고개 인근에 있는 양지면 도창말에서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를 거쳐 백암면 가창리 두평이란 마을로 숨어들었다. 세 사람은 인근 동리 부잣집으로 흩어졌는데, 그는 가창리 학자골 안씨댁에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하게 됐다. 열심히 숨어 일하길 수년. 어느 덧 20대 중반이 된 최삼현은 성실한 그의 모습을 유심히 봐왔던 이웃 김씨에 의해 14세의 처녀와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부인은 어린 14세 상산 김씨였다.

의병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듯이 결혼 후 5남2녀를 두고 해방될 때까지 과거 행적을 일체 감추고 살았다. 해방 후에도 가슴 속 얘기를 꺼내는 것은 8·15 광복절 등 특별한 날이었다고 한다. “음식 투정을 하면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구하려고 4,5년간 찬밥도 못 먹고 밤잠도 못 주무시면서 고생하셨는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는 절대 찬밥을 드시지 않으셨어요.”

최완영씨는 또다른 일화를 소개했다. 한 번은 초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의병은 먹을 것이 없어 굶기도 하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밥을 훔쳐 먹으며 민폐를 끼쳤다고 하더라”는 말에 풀이 죽었는데, 지나가던 어른이 아버지 이름을 말씀하며 “그 분은 옛날에 일본과 싸웠던 의병이셨고, 대단한 애국자였다. 너희들이 더 크면 알게 될 거다”는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이틀 후 최 지사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백암면사무소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던 장면을 완영씨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과거를 애써 숨기는 것처럼, 의병에 나섰던 최삼현 선생 역시 평생 자신의 행적을 제대로 후손에 알리지 않고 가슴속에 묻은 채 세상을 등졌다.

“어려서는 부끄러워했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신 부친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죽기 전에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이자 소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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