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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독립운동 유적지, 독립운동가 자취를 찾아서3·1만세운동 100주년 특집1]

경기지역 독립운동의 성지 ‘용인’···
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물, 그리고 근대 역사 문화의 ‘명암’ 간직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 여사 자택(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을사늑약’에 항거해 순국한 민영환과 이한응,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유근, 의병활동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임경재와 정주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여준과 김혁 그리고 오광선, 3대 독립운동가문의 딸 오희영, 항일투사 정철수, 수지와 포곡에서 용인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덕균과 권종목. 활동시기도, 계층도, 투쟁 방식도 서로 달랐지만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용인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됐던 3월 21일을 맞아 ‘용인3·21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나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통해 선열들의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 오는 3월 1일이면 독립만세 함성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게 한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는다. 반외세 구국항쟁의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온 용인에는 용인 출신 독립지사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와 아픈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본지는 국권 침탈로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한 용인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와 유적지, 그리고 독립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기념탑을 찾았다.

일제 항거의 시작 ‘을사늑약’ 그리고 순국

이한응 묘소(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용인에는 1905년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또 이에 항거해 순국한 이한응과 민영환 선생 묘소가 있다. 이한응 선생은 1905년 영국 주재 공사 서리로 활동하면서 영국 정부에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며 영일동맹의 부당성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제는 1905년 2월 한일의정서를 만들어 이한응 등 외교관을 소환하라고 고종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열사는 을사늑약 체결을 막아보려 애쓰다가 체결 6개월 전인 그해 5월 12일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용인시는 1999년 7월 이한응 열사의 묘소를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했다. 선생의 묘소는 처인구 이동읍 산70-1번지 용인테크노밸리 단지에 있다.

민영환 묘소(기흥구 마북동)

을사늑약에 항거해 순국한 외교관 민영환 선생의 묘소도 용인에 있다. 당초 수지구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봉분 없이 평장됐으나 1942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 기흥구 마북동 산36번지로 이장됐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마저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박탈했다. 민영환은 문무백관들과 상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군대에 의해 궁궐에서 끌려 나오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1월 30일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세 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민영환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됐다.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의병장과 의병활동

임경재 동상(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일제의 강제병합에 의한 자주권 박탈과 고종의 강제 퇴위로 전국 각지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의병활동이 대표적이다. 특히 친일단체 일진회의 본산이 송병준의 별저로 알려지자 부근에서 의병과 일본군과의 교전이 자주 일어났다.

용인 출신 의병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옥여 임경재다. 임경재 의병장은 고종의 강제 퇴위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1907년 의병을 모집해 용인 굴암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 한편, 이천 여주 안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수차례 교전으로 많은 부하를 잃자 부대를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그해 11월 고향집에 들렀다가 송병준 별장에 주둔 중이던 일진회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본군과 친일파를 꾸짖으며 저항하다 현장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처인구 양지면 평창1리 마을 입구에 옥여 선생의 동상이 있다.

최삼현 묘소(처인구 백암면 가창리)

충북 음성 출신으로 허위부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최삼현 지사의 묘도 용인에 있다. 최삼현 지사가 어떻게 의병활동에 가담하게 됐는지는 남아 있는 사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변인의 증언에 의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허위 의병부대 휘하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허위 부대가 패한 뒤 몸을 피해 은신하던 중 1912년 용인 백암면 가창리에 정착해 일제 강점기 내내 숨을 죽이고 농사를 지으며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1945년 8·15해방을 맞자 가족이 모두 나와 백암면사무소 마당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최완영 전 용인시의원이 최 지사의 5남이다. 선생의 묘는 처인구 백암면 가창리 산30번지에 안장돼 있다.

정주원 의병 교전지(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용인에는 의병활동과 관련한 유적지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정주원 의병 교전지와 용덕사(당시 굴암사)가 있는 굴암산이다. 정주원 의병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명의 의병, 양지와 양성에서 의병을 모집 150여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1908년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주로 안성과 양지, 죽산(현재 원삼면 죽능리)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펼쳤다.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능말 버스정류장 옆에 정주원 의병 교전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용덕사(처인구 이동읍 묵리 산57)는 구한말 용인군과 양지군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용인지역 항일 의병투쟁의 중요 근거지로 활용됐다. 의병장 정주원뿐 아니라 임경재 의병장은 7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굴암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후퇴하게 된다. 이에 일본군은 이 일대 의병활동을 토벌하기 위해 1907년 9월 굴암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의병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1919년 굴암사 주지 원공스님은 고종 승하 소식에 서울에 들렀다가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접하고, 용인에 돌아와 3월 23일 굴암사 승려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됐다고 전해진다.

들불처럼 번진 용인 만세운동

수지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수지구 풍덕천1동)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경기도에서는 7일 시흥을 시작으로 22개 부·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용인 만세운동은 그해 3월 21일 새벽 원삼면 좌항리와 양지면 평창리 경계인 좌찬고개에서 시작됐다. ‘3·21용인만세운동’은 지역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4월 3일까지 13회에 걸쳐 1만3200명이 참여했다. 용인에서 만세운동은 원삼면을 비롯해 수여면(옛 용인읍), 수지면, 포곡면, 기흥면, 내사면(현 양지면), 남사면, 외사면(현 백암면) 등 용인 전역에서 전개됐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에 의한 무력 진압 과정에서 35명이 목숨을 잃었고, 14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00여명이 체포돼 모진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용인 만세운동은 3월 21일부터 시작됐다. 현재 용인독립운동 기념공원이 있는 좌찬고개에서 새벽녘에 출발한 좌항리와 맹리 주민 200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로 향했다. 이어 백암면(외사면) 백암리로 이동하던 시위대는 원삼면과 백암면 경계 비둘기고개에서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고 수십명이 체포됐다. 24일에는 김량장보통학교 학생 30여명이 졸업식을 마친 후 시내에서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3월 28일과 29일 절정을 이뤘다. 당시 수여면 김량장리 용인군청 앞에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모현면 초부리에서 김병선·권홍규가 이끄는 시위대와 포곡면 삼계리 권종목이 이끄는 시위대가 합세했다. 이어 둔전리 정규복·권명보가 이끄는 시위대와 함께 김량장으로 향하다 헌병의 발포로 해상됐다. 금어리에서는 홍종옥·종엽 형제와 이인봉이 이끄는 시위대가 만세운동을 참여했다. 포곡 삼계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종목 선생의 공적비는 당초 포곡읍 삼계리 도사마을 입구에 있던 것을 안동 권씨 묘역으로 옮겼고, 홍종엽 선생 묘는 포곡읍 금어2리 개인별장이 있는 야산에 있다.

권종목 공적비(처인구 포곡읍 삼계리)

3월 29일에는 당시 수지면 고기리 구장 이덕균과 안종각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동천리와 풍덕천리 면사무소를 거치며 2000여명으로 시위대가 늘었다. 마북리 물레방앗간 부근에서 일본군 총격으로 안종각 선생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이덕균 선생이 체포됐다. 이튿날인 30일에는 기흥면 하갈리에서 김구식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고, 읍삼면(죽전동) 죽전리에서 이화신과 고주원이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의 기독교인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300여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덕균 선생은 수지구 고기동 산77번지 광주 이씨 선산에 안장돼 있다.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좌찬고개에는 2011년 ‘용인 3·1만세운동 기념탑 공원’이 조성됐다. 기념탑에 새긴 건립 취지문에는 ‘용인은 3·1만세운동 당시 시위가 전개되었던 경기도 22개 부·군에서 두 번째로 많은 지역민이 참여한 고장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외세와 불의에 맞서 싸웠다’라는 글귀 적혀 있다. 수지구 풍덕천1동 새마을공원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을 바탕으로 100년 전 수지구민들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수지3·1만세운동 기념탑’이 건립됐다. 주탑은 태극 문양에 만세를 부르는 손 모양이 형상화 돼 있고, 부조형물로 펄럭이는 태극기 형상 위에 건곤감리 4괘가 설치돼 있다.

용인 출신 독립군 목숨 건 해외 무장투쟁

김혁 기념비(기흥구 구갈동)

독립운동은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 김혁 장군이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기흥구 농서동 출신인 선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만주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군 지도자였다. 김혁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주 김씨 갈천공파 후손들은 기흥구 구갈동 성지중학교 맞은편 김혁 공원 내에 1985년 8월 15일 기념비를 세웠다.

2015년 전지현 주연의 영화 <암살>이 상영됐다. 일본 고관 암설과 관공서 폭파 등을 하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근대 역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의열단 활동을 그린 영화다.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파담이 고향인 남정각 지사도 의열단원 중 한 명이었다. 남정각 선생은 만세운동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했다. 조성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폭파 목표로 정하고 1923년 2월 서울에 잠입했다. 군자금을 모으던 중 그해 친일파의 밀고로 체포돼 5년여간 복역한 뒤 출소해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지하운동을 펼쳤다. 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해 1990년 5월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고향인 파담 ‘약천 남구만 선생 별묘’ 인근 야산에 ‘남정각 선생 유허비’를 건립했다.

오의선 생가(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처인구 원삼면은 독립지사가 다수 배출됐다. 원삼면 죽능리에서 태어난 오의선 지사는 3·2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8개월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제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며 무장독립운동 세력 통일에 노력했으며, 국내로 들어와서는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1931년 일경에 붙잡힌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42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원삼면 죽능리 659-2에는 선생이 체포되기 전까지 살던 생가가 남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인근 선산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오인수와 아들 광선, 손녀 희영·희옥은 용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죽능리 출신 오인수 의병장은 용인, 안성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1907년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이끈 토벌대에게 체포돼 8년 간 옥고를 치렀다. 아들 오광선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했으며 1937년 김구 주석의 특명을 실행하다가 베이징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하지만 가명으로 버텨 3년형을 받고 1941년 출옥해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부인 정정산 여사 역시 만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오광선 장군의 장녀 희영은 중국 부양에서 활동했다. 차녀 오희옥 여사 역시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원삼면 죽능리 청룡말에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항쟁 기적비가 건립됐다.

3대 독립운동가 기적비(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독립항쟁 유적지와 수탈의 역사현장

원삼면 죽능리 능골 390-1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삼악학교 터가 있다. 죽능리에서 태어난 여준 선생이 오태선·오용근과 1908년 설립한 학교다. 여준 선생은 국권을 잃자 서간도 삼원보로 망명한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내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만주사변 당시 1932년 퇴각하는 중국군에 의해 희생됐다. 삼악학교 터에는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여준 선생이 일제 침략기인 1908년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펼치기 위해 설립한 삼악학교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삼악학교 터 표지석(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원사면 문촌리에는 프로문학가 안막과 무용가 최승희 부부가 결혼 후 살림을 했던 생가가 남아 있다. 최승희는 해방 후 안막을 따라 월북해 무용극 창작에 힘을 기울였지만, 안막이 숙청당한 후 1967년 경 숙청돼 2년 뒤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촌리 생가에는 바깥채가 원형대로 남아 있지만,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옛 송병준의 별저 터(처인구 양지면 추계2리)

용인에는 독립운동 유적지와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침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처인구 양지면 추계2리 239번지에는 매국노 송병준의 별저 터가 있다. 99칸에 달했던 별장 흔적은 남아 있지는 않다. 그의 아들 송종헌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으며 만든 기념비가 양지초등학교 운동장 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일제 곡물 수탈의 현장인 수여선 철로 교각 일부도 남아 있다. 수여선은 일제강점기 여주 이천 용인 등 곡창지대와 경부철도를 연결해 쌀 반출을 원활히 하고, 일본 자본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해방 이후 국철로 흡수됐지만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72년 3월 31일 마지막 운행을 했다. 처인구 삼가동에 교각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함승태 기자  stham@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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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처인승첩 기념 전국 백일장 수상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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