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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 김혁 장군 증손 김성태 가족을 만나다애국지사 후손이 들려주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1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7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불행하면서도 의미 있는 해였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일제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했다. 군대마저 해산되자 조선 각지에서 울분을 토해내며 일제와 전면전을 치르는 의병전쟁이 본격화 됐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인 1919년 역시 우리 근대 역사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한 해였다.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만세운동, 그리고 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무장투쟁으로 완전히 전환된 것이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인의 안위를 뒤로한 채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살다간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후손들로부터 듣는 특집을 마련했다. /편집자

“거룩한 부담감을 넘어 3·1운동이 혁명이 되기까지”

김혁 장군 초상화

역사적 사건은 세월이 흐르면 평가가 이뤄진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근거한 평가는 한 치 오차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정의라고도 한다.

딱 100년 전인 1919년. 일제의 반인류적인 행위에 항거한 3‧1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퍼졌다. 이에 맞춰 정부는 올해 성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용인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용인도 치열하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 시절. 기억해야 할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한 인물들이 있다.

신민부를 결성하고 만주 독립영웅들의 선생으로 무장투쟁을 이끈 오석 김혁<1875~1939> 장군. 용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그는 오랜 옥중 생활로 얻은 중병을 이기지고 못하고 1939년 4월 순국했다. 이후 80년의 세월이 더 흐른 올해 증손자인 김성태씨 가족을 만났다. 그는 거룩한 부담감에 담긴 선조의 아련한 기억을 풀었다.

“어린 시절 나라의 독립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증조께서 1974년 국립묘지로 이장하신 이후 현충일이면 부모님과 함께 찾아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죠. 눈물과 한숨이 꽉 찬 그 곳이라는 기억이 많습니다. 할머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장군님의 역사적 활동을 듣고 (나 역시)국가를 위해 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이 생긴 것이죠”

4대손인 성태씨 가족. (왼쪽부터) 김성태씨, 둘째 아들 상혁, 아내 이정하. 첫째 아들 상욱.

지금 수원지방법원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성태씨와 그의 아내 이정하씨는 이날 인터뷰에 맞춰 한가득 자료를 챙겨왔다. 김혁 장군과 관련한 것들이다. 장군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빠지지 않았을 만큼 꼼꼼하게 정리됐으며, 최근 새롭게 찾아 낸 자료들도 상당수였다.

그중 한 장의 사진에 눈길이 끌렸다. 가족이 만든 컵 속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백범 김구의 명언이 적혀 있었다.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접하는 일제 강점기 역사와 그 중심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생각은 점차 존경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자신보다 더 크다고 여겨지는 것에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자세에 위대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가족 모두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두 아들도 (컵 사진을 보여주며)남다른 애국심을 가지고 있어요”

김성태씨는 후손으로 아쉬움과 죄송함이 가득하단다. 여전히 일부 자료는 왜곡된 채 방치돼 있으며, 역사적 평가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혹독한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치열했던 장군의 삶을 생각하면 밀려오는 슬픔이 그지없단다.

“증조부님께서 피체되셨다는 신문기사에 실린 모습은 가슴을 늘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립습니다.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증조부님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친일 신문에는 증조부의 업적을 폄훼하는 왜곡된 기사가 실렸고, 그것이 그대로 전시돼 있기도 합니다. 여전히 후손으로 해야 할 일이 많고, 지금껏 챙기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국립묘지에 자리 잡은 김혁 장군 묘(사진 제공 후손 김성태 가족)

역사의 아픈 교훈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궁핍한 삶을 산다는. 김혁 장군 후손들 역시 만만치 않은 현실에 직면했었단다. 그럼에도 성태씨 가족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넘어 증조부의 존함을 또 찾고 또 찾았단다. 장군의 흔적 찾기에 더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작용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흐름 앞에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순국 80주년을 맞아 이들은 또 다른 큰 걸음을 채비하고 있다.

“저는 장군님의 증손자입니다. 독립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서기 전 관련된 자료를 상당수를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여나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죠. 러시아 화가가 그린 목탄화로 그려진 증조부님을 뵈는 순간, 증조부님 눈을 마주 대하는 순간, 저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얼굴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아직 초상화도 제대로 그려진 것이 없어요. 올해 순국 80주년에 맞춰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께서도 많은 관심을 주셨으면 해요”

최근 발견됐다는 김혁 장군 필체

한 가정의 가장이던 김혁 장군. 그는 독립 운동 길에 나설 때면 가족들에게는 어떤 말도 없었다고 한다. 냉정하리만큼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태씨 가족이 보여준 한 자료에는 자식을 생각하는 장군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최근 아들과 함께 중국을 찾아 상하이 임시정부와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다녀왔는데 다시 한 번 증조부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당시에 살았더라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 같아요.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3‧1운동은 단지 한정된 곳에서 일어난 것 아닙니다. 전국에서 펼쳐진 대대적인 혁명이죠. 3‧1운동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임영조 기자  yjlim@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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