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20 김성남, 이용환 등은 서울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났음을 듣고 20일 밤 양지면 평창리 도창마을 입구 최상근의 주막에서 최종 모임을 갖고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 제작

3.21 원삼면 좌찬고개에서 좌항리와 맹리 주민 20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원삼면사무소까지 시위 전개. 백암면으로 이동하던 시위대는 원삼면과 백암면 경계인 비둘기고개에서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고 수십 명이 체포됨.

3.23 이동읍 용덕사(당시 굴암사) 승려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참여.

3.24 김량장보통학교 현 용인초등학교 졸업식 후 30여명의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 만세를 외치다 헌병대에 의해 해산됨.

3.28 수여면(현 중앙동) 김량장리 용인군청 앞에서 1000여명의 주민들이 시위를 전개. 모현면 초부리에서 김병선 등이 이끄는 시위대와 포곡면 삼계리 권종목이 이끄는 시위대가 합세, 둔전리의 정규복 등이 이끄는 시위대와 함께 김량장으로 향하던 중 헌병대의 발포로 해산. 금어리에서 홍종욱·종엽 형제 등이 이끄는 시위대가 김량장으로 향하다 헌병의 발포로 해산.

3.29 수지면 고기리 이덕균과 안종각 주도로 만세시위 시작. 동천리와 풍덕천리를 거치며 시위대가 2000여명으로 늘어남. 마북리에서 일본군 총격으로 안종각이 순국하고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이덕균이 체포됨.

3.30 기흥면 만세운동 시작. 하갈리에서 김구식의 주도로 만세시위 발생.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의 기독교인 만세시위에 가담.

3.31 백암면 백암리에서 3000여명이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습격. 헌병의 발포로 1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 원삼면 사암리에서 헌병 발포로 성낙중이 피살되고 시위대 해산. 이동면 송전리에서 약 200여명의 주민이 만세를 부르다 헌병에 의해 해산.

4.2 원삼면, 양지면 남곡리와 송문리, 남사면 창리, 백암면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 발생했지만 해산되거나 사전에 저지됨.

4.3 백암면 백암리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했으나 사전에 저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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