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은 빨리 지나가서 찰나의 계절과 같다. 기원전 6세기 공자는 <시경>에서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 했다. 몹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15분쯤 되는 한 시각이 세 번의 가을처럼 길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삼추가 여일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짧아진 가을이다. 

가을철 석 달은 만물이 성숙해 결실을 보는 시기이다. 하늘 기운은 맑고 소슬해지고, 땅의 기운은 서늘해지며, 만물의 색이 변한다. 일찍이 공자는 <예기>에서 “하늘에는 사시가 있으니, 봄·여름·겨울·가을과 바람·비·서리·이슬이 가르침이 아닌 게 없다”라며 대자연의 이치를 가르쳤다. 고려 때 나옹선사 시에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라고 가을날의 무소유를 노래했다. 무언가 기대하며 사는 우리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조락의 계절을 지나면서, 내년을 다시 기약하게 된다.

풍요로움을 연상시키는 가을은 사투리로 ‘갈’, ‘가리’라고 한다. 이는 ‘곡식 단을 거두어 차곡차곡 쌓아 올려 더미를 만든다’라는 뜻에서 생긴 말로,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때를 의미한다. 남녘 방언으로 추수하다를 ‘가실하다’로 쓰는 데서도 알 수 있다. 16세기 무렵 ‘열매를 거두어 들인다’라는 뜻에서 생겨난 영어의 어텀(Autumn)과 미국식의 폴(Fall)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라는 뜻으로 가을에만 유독 두 개의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순우리말 가을은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ㄱㆍㅿㆍ’로 표기됐다. 한자로는 기원전에 편찬된 <예기> <월령>에 ‘중추(中秋)’라고 처음 쓰였다. 또 가을을 삼등분해 처음인 맹추, 으뜸인 중추, 끝 무렵을 계추라고 구분해서 썼다. ‘계수나무 꽃이 가을에 핀다’는 데서 유래한 계추와 달리, 늦가을을 말하는 만추는 중국 당나라 때 <남사>에 “만추(晩秋)에는 해가 짧아지고 일이 한가하다”

또 당나라 시성 두보의 시에 등장하면서, 또 가을철을 뜻하는 추계(秋季)는 송나라 때 소동파의 동생 소철이 <소문공본전>에 쓰면서 널리 쓰였다. 고려 때 이규보는 <동국이상국후집> 시에서 늦가을을 추계로 적었다. 가을을 뜻하는 오추(梧秋)는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라는 뜻으로 송나라 주자의 <권학문>에 등장한다. 

일 평균 기온이 섭씨 20도 이하로 내려가 9일간 유지될 때, 그 첫 번째 날을 가을의 시작일로 기상학에서 다룬다. 가을의 상징인 단풍(丹楓)은 주로 붉은색으로 변해 붙인 이름이고, 홍풍(紅楓)과 상풍(霜楓)으로도 불렀다.

산 전체에 20%가량 물든 경우를 기준으로 일기예보에서 “첫 단풍이 들었다”라고 이름 붙인다. 이파리가 다른 색깔로 물드는 단풍은 잎 속의 엽록소가 분해되고, 안토사이안이란 물질이 생성돼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단풍은 해충으로부터 열매 즉, 종족을 보호하고 전하기 위한 나무의 대응책이라고 한다.

돈각스님
돈각스님

금강산의 가을을 단풍 이미지에 담아 풍악(楓嶽)이라 했지만, 아무래도 가을 정취는 오동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것을 볼 때가 더 익숙하다. 1905년 미국의 작가 오 헨리가 쓴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에 관한 생각은 오직 자신만의 몫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집 가까운 곳에 짧은 단풍놀이라도 다녀오는 여유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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