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를 지켜온 사람들]포곡 상여놀이 선소리꾼 권순기 씨

전국 불려 다니며 소리 인정받아
구슬픈 곡조로 위로 줬던 향토문화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의 마음이 과거나지금이 다를 것이 있을까. 그러나 장례절차와 모습은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사이 간소화되고 달라진 점도 많다. 과거 집에서 하던 시신 처리나 운구를 병원과 전문 장례업체가 맡으면서 상여를 대신해 영구차가 등장했다. 상여를 장지까지 이동할 때 죽은 자와 산 자를 위로하던 선소리꾼 역시 이제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와 유운리 일원에서 전승돼온 포곡의 상여놀이 선소리꾼 권순기씨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2006년부터 2014년 포은문화제 천장행렬 선소리꾼으로 참여해 2007년부터 3년 연속 상여놀이대회 1위를 이끌어냈고, 2013년 경기민속예술제에서는 예술상을 따냈지만 지금은 재현행사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다. 

권씨는 구슬프면서도 찰진 소리로 상여를 이끌던 선소리꾼이다. 특유의 탁 트인 목소리는 장지를 향하는 운구 행렬을 울리고 웃겼다. 길게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시간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갈라짐 없이 시원하게 하늘로 들판으로 뻗어나갔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과정을 소리로 풀어낸 ‘회심곡’을 부르면 상을 당한 가족부터 주민들까지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면 권 씨는 다시 분위기를 바꿔 쓴 소리, 좋은 소리로 사람들을 웃겼다. 장례를 치르는 이들은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죽은 자를 떠나보냈다. 그야말로 먼 길을 가야할 이와 현세에 남아 살아가야할 이들의 아름다운 이별을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권순기 씨의 한이 가득 담긴 목소리는 어린 시절 고생과 아픔이 일조했다.  
“7살 되던 해 설 전날 음식을 다하신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며 앓아 누우셨는데 그 다음날 돌아가셨어요. 그 후에는 살아가는 게 너무 고달파서 그리움도 몰랐던 거 같아요.” 
집에서 매일 쫓겨나 이 집 저 집 밥을 얻어 먹어야했던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편한 곳은 상갓집이었다. 밤낮으로 며칠씩 상을 치르니 음식 심부름, 상여 조립, 장사지내는 일을 도우며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상갓집에 가면 무섭다고 피하거나 안 가려고 했지만, 권씨는 오히려 사람들이 곡을 하고 상여가 나가는 걸 따라다녔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익힌 상여소리는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고 차곡차곡 쌓였다. 이후 1981년 권씨는 선소리에 정식으로 입문해 30대인 1991년 선소리꾼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동네에 초상이 났는데 우연히 상여소리를 했어요. 그랬더니 이후부터 사람들이 자꾸 하라고 시켰죠. 선소리를 하시던 어르신들을 따라다니며 듣고 배우고 하다 선소리꾼이 된 거예요.”
‘포곡에서 권순기 만큼 소리하는 사람은 없다’는 소문이 날만큼 권씨는 선소리꾼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멀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가리지 않고 권씨를 불러 상여를 이끌게 했다. 

권순기씨의 목소리는 선소리꾼으로 타고 났다 싶을 정도로 서글펐다. 그의 소리엔 ‘한’이 담겨 있었다. 그 ‘한’은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안겼다. 그런 권씨는 선소리꾼의 존재가 점점 지워져가고 있는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선소리꾼은 내가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해요. 이걸 배우는 사람도 없고 아예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전통 상여문화에는 배울 점이 많죠. 죽음에 대한 예를 정성을 다해 갖췄다고 할까요. 그 속에서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이겨나가는 지혜도 있어요. 이렇게 잊히는 게 서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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