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특집] 순국 80주기 김혁 장군을 만나다

딱 100년 전이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 때는 목숨을 걸고 되찾아야 했다. 한글 사용이 그랬으며, 긴 세월을 이어온 명절도, 가족 간의 예의도 눈치껏 챙겨야 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생각조차 잔인 할 정도로 제약 받았다. 역사는 그때를 일제 강점기라고 한다. 무력을 동원해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35년(1910∼1945).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과 그 희생을 고스란히 담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당당한 독립국가 모습을 되찾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역사에 기록된 용인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김혁 장군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오석 김혁 장군, 숭고한 65년 발자취를 따라 걷다

2002년 4월 독립 운동가로 선정 된 김혁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열린 강연회. 하지만 호인 오석을 적은 한자가 오기될만큼 당시 장군의 업적에 대한 연구는 미흡했으며, 현재까지도 후손들은 발품을 팔아가며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흔적을 챙기고 있다.(사진 제공/김혁장군 유가족회)

 

양반 집안에서 출생한 김혁은 8세부터 향리에서 대유학자 동전 맹보순에게 한문을 교육 받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초‧중‧고등학교를 넘어 대학생 나이인 21세까지 한학 배움은 이어졌다. 스승인 맹보순은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김혁이 1898년 24세 나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기 전 이미 민족의식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기록에는 무관학교 입학 자체가 스승의 권유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후 그는 1900년 26세 나이에 육군 보병 참위(현재 소위)로 임관한 이후 1903년 부위(중위)로 승진한데 이어 33세인 1907년 김혁 정위(대위) 자리에 오른다. 당시 참령(소령)이 가장 높은 계급임을 감안하면 김혁 정위는 군 내부 역할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됐다.

퇴직한 김혁 곁에는 스승인 맹보순이 있었으며, 소실적 동문이던 이대선, 이영선 김학조가 있었다. 이대선은 3‧1운동 때 피살된 것으로, 이영선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군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1919년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이 용인에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김혁은 주민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3창을 외쳤다. 독립을 위한 외부 활동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같은 해 애국 청년을 모아 흥업단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취임했다. 46세인 1920년에는 의용군을 조직 역시 부단장에 취임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범도, 이청천 등도 당시 함께 했다. 이듬해에는 소년 접경지대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대일항쟁을 총지휘했다. 49세인 1923년에는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중책 한 가운데 섰다. 1년 만에 국민위원을 자진 사퇴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좌진과 1925년 신민부를 결성,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교장에 김혁, 김좌진은 부교장에 이름을 올렸다.

치열한 독립운동을 펼치던 김혁 장군은 54세이던 1928년 1월 신민부 총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신의주지방법원이 선고한 징역 10년이 확정(이후 2년 경감), 평양 감옥에서 7년, 서대문 감옥에서 1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35년 병환이 위독해져 가출옥됐다. 당시 김혁 장군은 61세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1937년 김좌진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한 일송 김동삼 장례식이 열린 심우장에 유일하게 무관으로 문상을 갈 정도로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2년여가 지난 1939년 4월 23일 김혁 장군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순국 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된데 이어 1974년에는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2002년에는 국가보훈처가 4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순국 80년 만에 공개되는 초상화

순국 80년만에 표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만큼 제대로 그려진 김혁장군 초상화. 원안은 이전에 활용된 사진. (사진 제공/유족회)

용인을 넘어 대한민국 독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친 김혁 장군이지만 정작 제대로 된 초상화가 하나 없었다. 그저 예전에 어느 신문에 실린 모습이 전부였다. 1928년 신민부 기습에 따른 체포 직후다. 흐릿한 한 장의 사진이지만 강직함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또 다른 장군의 모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후손들은 장군의 표정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증손 3형제 등 유족회가 순국 80주년을 맞아 특별한 자리를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년 진행해온 추모제를 올해는 규모화 시킨 것이다. 올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미루고 미뤄온 역사적 숙제를 차근차근 해 나가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후손들 4월 23일 순국 80주기를 맞아 제대로 그려진 초상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결코 억울해하지도 두려움 없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 전문화백을 통해 제작에 들어갔다. 5개월간의 작업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김혁 장군 종손인 김성태 부부는 2000년 4월 23일 이후 숙원으로 남았던 장군의 초상화를 이제야 완성하게 됐다며 소감을 밝혔다.

무엇보다 후손들은 올해를 특별한 한해로 보고 있다. 1919년은 증조부가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해다. 김혁 장군은 1919년 용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데 이어 5월에는 중국 봉천성 무송현으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펼쳤다. 이어 8월에는 김호 등의 동지와 수백명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흥업단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취임했다.

김혁 장군 증손 김성태씨는 “저희 어머님이 최근 돌아가셨습니다. 유품 정리를 하다 서랍에 지갑이 있었는데 그 속에 아버님 광복회 배지와 행사 참가해서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김혁 장군 며느리(김용기 아내) 주민등록증도 들어 있었고 2002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당시 제작된 팸플릿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항상 마음에 자긍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모습에 존경심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런 자긍심과 존경하는 마음을 추모제에 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추모제는 김성태씨를 비롯해 김혁 장군 증손인 3형제가 중심이 돼 추진된다. 물론 현충원이나 용인시청, 용인시의회, 용인국학원, 용인문화원, 선비분화학회 등 많은 도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장군의 역사적 활동에 비해서는 관심도가 낮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10년 전이다. 2009년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옆 주택단지 인근에 장군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생겼다. 애초 이 공원 이름은 구갈근린2공원이었다. 용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시민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때문에 공원 이름에 ‘김혁’을 사용한 자체가 큰 의미였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오히려 주택단지에 주변에 생활하는 일부 시민들은 역사성과는 무관하게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만큼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정신이 우리 일상에 깊숙하게 파고들기까지는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최근 영면에 들어간 김혁 장군의 증손 성태씨의 어머님이 유품에는 광복회 뱃지 등이 들어있었다. 후손들이 지키고자 했던 김혁장군의 혼과 충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제공/유가족회)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는 후손들은 단지 올해 행사는 특별하게 치루고 싶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증손 3형제는 김혁 장군 기념사업단 구성도 추진하고 있다. 내년 추모제는 사업단 차원에서 개최 해보겠다는 의지다.

김혁 장군 유족들은 바라고 있다. “추모제를 준비하는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올해는 처음으로 규모화 시켜 추진해 우리 가족들이 많은 부분을 부담하는데 내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수 있도록 기념사업단 구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혁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제는 23일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10시30분부터 진행된다. 추모제에서는 현충원에서 준비한 예식뿐 아니라 용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 단체의 식전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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