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물정에 익숙한 성인이라 해도 행동 기준을 어디다 둬야 할지 ‘시공간’에 따라 변하니 말이다. 하물며 이제야 세상 흐름에 관심을 가질 일곱 살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욕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런 자녀에게 “언제 철들래”란 말로 얼른 세상 흐름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곤 한다.  

딸이 언제부터인가 토끼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따라 하는 것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면 그저 “귀엽다” 정도로 대구하지만 심하지 싶으면 꼭 한마디 한다 “언제 철들 거야”

외동으로 자라서 인지 딸은 누군가 어울려 놀길 늘 갈망하는 듯하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고 온날은 표정부터 다르다. 반면 그렇지 않는 날은 집으로 오는 길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느 날인가는 최근 단짝으로 간주되고 있는 친구가 나올 시간이 됐다며 얼굴 한번만 더 보고 가겠다고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엄마와 나간 외출 길에서 새끼 고양이가 제법 친한 척한 모양이다. 무서워 직접 만지지는 못했지만 10여분 함께 노닐며 얼룩이란 이름도 지어주었단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얼룩이 출몰지역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딸을 불러 확인하니 비슷하긴 하지만 얼룩이는 아니란다. 꼬리와 눈알 색이 다르단다. 크기에도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하니 그냥 얼룩이 동생 즈음으로 해뒀다. 20여분 고양이를 만지며 즐거워하던 딸에게 귀가 할 것을 요구하자 “다시 여기서 만나자”란 끝 인사를 건넸다. 

평소 토끼 흉내를 내던 딸은 그날 이후 고양이 흉내를 종종 낸다. 하물며 아침에는 고양이 세수를 한다. 왜 그런 행동을 하냐고 물으면, 고양이가 귀여워 그렇단다. 자신이 귀엽게 보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 녀석 언제 철들까란 생각이 떠오른다. 

흔히 사회에 길들여지는 것을 ‘철들다’고 한다. 타협할 것은 그렇게 하고,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 말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어린 아이가 세상에 철들기는 쉽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철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철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알게 되다’란다. 

다시 시간을 조금만 돌려보자. 딸이 만난 고양이. 성인 주먹보다 조금 큰, 굶주린 이유에설까? 아니면 사람의 정이 그리워서일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두려움 없이 다가와 기대며 드러누웠다.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차가 다니는 한길을 서성이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사리를 분별하는 것일까. 고양이에게 측은지심을 느낀 딸의 행동이 오히려 사리에 맞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철이 너무 들어 철철 넘쳐 부족현상까지 보이는 아빠의 눈으로 딸의 행동을 재단한 건 아닌지.  

며칠 전 딸이 썩은 어금니를 포함해 이빨 3개를 뺐다. 이빨 하나하나에 눈과 입을 그려 얼굴 형상을 잡아주더니 이름까지 지어줬다. 까치에게 줘야 새 이빨을 물어준다는 아빠의 말에 딸이 답했다. “아빠 새이빨은 잇몸 안에 있거든”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살며 철들어 간다는 미명하게 소통하는 방법을 잊고 살지도 모른다. 이제 자녀의 행동을 너무 철없게만 보지 말자. 그들의 행동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소통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게 세상에 제대로 철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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