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끝자락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몰라요’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중 

요새 ‘덕업일치’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덕후가 될 만큼 그 일을 좋아해서 본업이 돼버린 사람들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도서관 바로 앞 공간에 얼마 전 고양이 분양소가 들어왔다. 사장님이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 여러 마리를 키우다가 아예 고양이를 전문적으로 사육하고 분양하는 일까지 하게 됐단다. 덕업일치의 전형적인 사례다. 대부분의 수제 맥주 양조자들은 이런 덕업일치의 경우가 많다.

사연을 들어보면 우연한 기회에 수제 맥주를 접하거나 외국에 나갔다가 수제 맥주 맛에 반해 맥주를 공부하고 양조장을 창업한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필자처럼 취미로서만 만족하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수제맥주 양조업자들처럼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하다가 여건이 돼서 창업으로 가는 일이 많으니 덕업일치를 이루는데 이만한 아이템이 있을까 싶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처음에는 요리에 관심을 두다가 술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음식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궁합이니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덕업일치가 목적이 아니니 취미로서만 맥주를 빚는다 해도 이만한 취미가 있을까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맥주를 만들어서 가정에서 즐기거나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놓을 때의 뿌듯함은 가히 견줄 것이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는 ‘임기 중 백악관에서 맥주를 양조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임기가 끝나고 은퇴해서 양조장을 만들기는 했으나 임기 중에 양조를 한 것은 오바마가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처음이 아닐까 한다. 취미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일에도 열정적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도 뛰어났지만, 자가 수제맥주 양조자로서도 탁월한 맥주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만든 맥주에 아내 미쉘이 직접 양봉한 꿀을 넣어서 ‘화이트 하우스 허니 에일’이라는 멋진 이름의 맥주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맥주 100병을 슈퍼볼 경기장에서 판매까지 했다. 대통령이 만든 세계에 단 하나뿐인 맥주를 누가 안 사먹을 수 있을까? 없어서 못 판 이 맥주로 인해 수제맥주의 성지라고 불리는 미국의 맥주 위상은 다시 한 번 높아졌다.

팍스브리카나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IPA(인디안 페일 에일)를 계승해 수제 맥주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미국 수제 맥주는 언젠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상징으로 기억될 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제도와 세법 개선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관 위주의 통제 정책에 익숙한 동양 사회는 술을 세금의 원천으로 여기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우리나라는 술을 음식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세금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무엇이든지 좋은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제도 개선이 있지 않고는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제대로 된 문화로 자리 잡지 않으면 산업도 발전할 수 없다. 문화의 깊이 없이 양으로 승부하고 가격으로 승부하는 산업은 머지않아 레드 오션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주세법 때문에 개인이 만든 맥주를 팔 수 없다. 심지어 선물로 주는 것도 불법이다. 같이 마시는 정도에서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단계이다. 꼭 팔 수 있어야만 취미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성껏 만든 맥주를 누군가가 화폐를 통해서 가치를 인정해 준다면 그 취미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문화가 형성되면 그 취미와 연계된 산업은 튼튼히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 면에서 취미로 맥주를 만드는 필자에게 오바마 대통령의 맥주 판매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수제 맥주가 뜨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크레프트 브루어리들이 다 잘되지는 않는다. 유행의 흐름을 타고 쉽게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도 많다. 아마도 이들 중 상당수가 취미로 오랜 세월 맥주를 만들면서 유통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소량이지만, 자기가 만든 맥주를 주변에서부터 판매하면서 자리를 잡아왔다면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량 생산, 대량 유통이 미덕이던 2,3차 산업혁명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쉬프트 업 하려면 제도의 개선을 통해 ‘덕업일치’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응원해 주었으면 한다. 자기가 만든 맥주를 선물로 주면서도 마음 한쪽에 꺼림칙함이 남아 있는 ‘자가 양조 덕후’들이 당당히 자기 맥주를 뽐내며 권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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