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21일은 용인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의 잔인한 압제에 항거하기 위해 불꽃처럼 일어난 3·1운동은 생존권 수호와 국민 주권 회복을 위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자주권을 빼앗더니 1910년에는 조선을 강제로 자국에 복속시켜 버리고는 무자비한 인권 탄압과 토지 점탈 등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게 됐다.

용인에서는 3월 21일 처인구 원삼면 좌전고개에서 지역 주민 2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바로 수여면, 포곡면, 기흥면, 수지면, 모현면 등 용인 전역으로 확산됐다. 3월 21일 시작된 용인 만세운동은 4월 1일까지 각지에서 13회에 걸쳐 일어났고 총 1만3200여명이 참가했다. 이는 당시 용인군 인구의 50%가 참여한 수치이고, 시위가 전개된 경기도내 22개 부·군 가운데 김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다. 그때 일본군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실종, 부상, 투옥된 희생자가 741명이었다.

좌전고개에서 시작된 용인의 독립운동은 비단 3·1운동 당시에만 국한된 일시적인 항일운동이 아니었다. 일찍이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민초들이 분연히 의병활동을 했는가 하면 자결로서 일제에 항거했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임옥여, 정주원, 이익삼 등은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민초들과 함께 용인은 물론, 광주, 이천, 안성 등지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또 1905년 영국 정부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 체결을 비밀리에 진행하자 주영공사 서리로 있던 이한응은 강력한 항의 표시로 음독 자결했다. 2차 영·일 동맹의 연장선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강한 항거 표시로 민영환도 자결했다. 또 석농 유근은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을사늑약과 이에 동조한 을사오적을 통렬히 질타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피탈하자 용인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용인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민족교육 운동을 펼치던 여준은 국권이 병탄되자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장을 지내며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년대 만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를 이끌었던 김혁 장군은 김좌진 등을 휘하에 두고 청산리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거뒀다.

또 오광선 장군은 광복군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부친과 부인, 두 딸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랑스런 일가를 이뤘다. 이외에도 의열단의 남정각, 남만주 항일유격대의 이홍광, 포은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조선의용군에서 항일 무력 투쟁을 펼친 정철수 등 수많은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이처럼 용인은 일제 강점기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고 선열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1999년부터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모여 출범한 단체가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이다. 기념사업회는 용인 독립운동의 자취를 조사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한편, 그들의 행적과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각종 학술사업을 운영해 오고 있다.

고무적인 것은 최근 국가보훈처 경기동부지청이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개청했다는 것이다. 용인, 성남, 광주, 하남, 이천, 여주, 안성 등 7개 시를 관할하면서 보훈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기동부보훈지청이 용인에 위치하게 된 것은 그만큼 용인시가 국가의 보훈 사업과 관련, 지역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며, 앞으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활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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