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용인독립운동 98주년 특집 ㅣ 용인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의병장 옥여 임경재 동상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박탈당하자 이에 항거해 민영환(1861~1905) 선생이 순국했다. 이한응(1874~1095) 열사는 을사늑약 체결을 막아보려 애쓰다 체결 6개월 전인 1905년 5월 자결했다. 언론인 유근(1861~1921) 선생은 을사늑약에 분개해 장지연과 함께 ‘시일야방성대곡’을 완성하는 등 <초등본국역사> 등 역사서를 편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3.1만세운동기념탑공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경기도에서는 7일 시흥을 시작으로 22개 부·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3월 21일 원삼면 좌항리에서 시작된 용인 만세운동은 지역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4월 3일까지 13회에 걸쳐 1만3200명이 참여했다. 왜경과 일본 헌병대에 의한 무력 진압 과정에서 35명이 숨졌고, 139명이 실종됐다. 502명이 부상을 당했고 주동자급 65명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옥여 임경재(1872~1907년) 의병장은 의병대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김혁장군 기념비

독립운동은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 김혁(1875~1939) 장군이 무장투쟁을 벌인데 이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남구만 선생의 6대손 남정각(1897~1967) 지사는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며 독립투쟁에 나섰다. 원삼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오의선(1889~1931) 지사는 해외에서는 임시정부에서, 국내에서는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남정각 유허비

원삼 죽능리 출신 오인수(1867~1935) 의병장은 국내에서, 아들 오광선(1896~1967)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용인 항일독립운동 유적 21곳…도내 두 번째

해마다 3월이 되면 용인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됐던 3월 21일을 맞아 ‘용인3·21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열린다. 때론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선열들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기도 한다. 반외세 구국항쟁의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온 용인에는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와 아픈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남아 있다.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도내 항일 독립운동 유산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한 결과 7700건의 유산이 확인됐다. 주요 유산으로는 △독립운동가 생가터, 관공서, 종교시설, 교육시설, 주거시설 등의 건조물 37곳 △3·1운동 만세시위지, 의병 진격로, 민중 행진로 등 경관 속에 남은 경관(발자취) 유적 182곳 △유품·일기, 일제강점기 재판기록, 사진, 신문·잡지, 지도, 독립유공자 공훈록·공적조서 등의 동산유산 7481건 등이다.

이 가운데 건조물과 경관(발자취) 유적 219건 중 화성시가 30건으로 가장 많고, 용인시 21건, 안성시 18건으로 뒤를 이었다. 경기도에서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지역이 용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실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2015년에 발간한 <발로 찾아가는 용인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일제 수탈의 현장이나 친일파 송병준의 별저터 등을 제외하고 13곳에 이르는 독립운동 유적 자료가 수록돼 있다.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던 3월 21일에 즈음,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거한 용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았다.

98주년 3·1절 찾는 발길 없어
 
제98주년 삼일절을 맞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기흥구 구갈동 성지초등학교 맞은편(강남마을3단지 4거리) 김혁공원 내 만주독립군 김혁 장군 기념비다. 용인에서 특정인을 기리기 위해 공원명으로 사용한 곳은 김혁 장군이 유일하다. 공원 입구에 김혁공원 안내도와 장군의 생애가 짧게 기술돼 있다. 기흥구 농서동에서 태어난 김혁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만주에서 치열한 무장 항일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군 지도자다. 1919년  3월 30일 기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주도하다 곧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21개 독립단체들이 결성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민부가 설립한 성동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김혁 장군의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고자 경주김씨 갈천공파 후손들이 1985년 8월 15일 이 곳에 독립기념비를 건립했다.

석농 류근 묘

김혁 장군 기념비에 이어 찾은 곳이 석농 유근 선생 묘소다. 유근 선생 묘소로 가려면 처인구 남동 태성중·고등학교 후문에서 현충탑으로 걸어서 10분쯤 올라가야 한다. 잘 닦인 도로를 따라 가다 현충탑 후문이 보일 때쯤 오른쪽에 유근 선생 추모비가 서 있고, 그 아래 50미터 지점에 선생의 묘가 있다. 기자가 찾았을 때에는 조화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빛바랜 태극기만 덩그러니 있었다.

현재 처인구 마평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해 명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장지연 선생과 함께 완성했다. 이후 민족의 고취를 위해 <신정동국역사>, <초등본국역사> 등을 발간했다. 1919년 4월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선생은 잦은 감옥생활과 숙환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21년 5월 눈을 감았다.

지금은 양지에서 백암으로 가는 17번 국도가 새로 뚫려 도로에서 보이지 않지만, 20여년 전만해도 양지면 평창1리 마을을 지날 때면 칼을 차고 진격을 외치는 듯한 역동적인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처인구 양지면 평창1리 평촌마을 입구에 아담하지만 잘 가꾼 공원 안에 세운 의병장 옥여 임경재 동상이다. 임옥여로 잘 알려져 있는 선생은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사람으로 고종의 강제퇴위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의병들의 활동지였던 용인 굴암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이천 여주 안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부대 해산 이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고향에 잠시 들른 선생은 1907년 11월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잡혀 현장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보 얻기 쉽지 않고 찾아가기 어려워

주말인 4일 독립운동 유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용인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돼 있는 이한응 순국열사 묘소(향토유적 제49호)를 찾았다.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동면 덕성리 산70-1 일대가 용인테크노밸리(덕성산업단지)로 조성되는 탓에 묘소 주변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구 국도 45호선에는 향토유적임을 알리는 이정표(덕성3리 금현마을)가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묘소로 가는 초입부터 유적지까지 길은 비교적 험난했다. 이동면 화산리가 고향인 이한응 열사는 1905년 영국주재 공사 서리로 활동하던 중 을사늑약 체결을 막아보려 애쓰다가 체결 6개월 전인 그해 5월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고종의 특별지시로 귀한한 유해는 국민들의 애도 속에 고향에서 가까운 이동면 덕성리 금현 선산에 모셔졌다.

2015년 전지현 주연의 영화 <암살>이 상영된 적이 있었다. 일본 고관 암설과 관공서 폭파 등을 하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근대 역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의열단 활동을 그린 영화다.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파담이 고향인 남정각 지사도 의열단원 중 한 명이었다. 약천 남구만 선생의 6대손인 남정각 선생은 만세운동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했다. 조성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폭파 목표로 정하고 1923년 2월 서울에 잠입했다. 군자금을 모으던 중 그해 친일파의 밀고로 체포돼 5년여간 복역한 뒤 출소해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지하운동을 펼쳤다. 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활동을 기리기 위해 1990년 5월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고향인 파담 ‘남구만 선생 별묘’ 옆 야산에 ‘남정각 선생 유허비’를 건립했다.

일부를 제외하고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지만 기자가 참고한 자료에 일부 오류가 발견됐다. 또 자료집 외에는 해당 독립운동가와 유적지에 대한 자료를 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곳(홈페이지 등)도 마땅치 않은 실절이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이나 청소년들이 해당 유적지에 대한 정보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항일운동 유적 발굴·보존 제도 마련 시급

오의선 지사 생가

며칠 뒤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과 3대 독립운동가 오인수·광선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로 발길을 옮겼다. 죽릉리 일대에는 용인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먼저 찾은 곳은 원삼면 죽릉리 669번지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다. 증죽마을 버스정류장 맞은편 100여미터 거리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한 선생의 생가는 언뜻 봐도 오래돼 보였다. 지금은 선생의 후손이 세상을 떠나 부인 이정희 여사가 홀로 가옥을 지키고 있다.
승죽마을(학일리 방향에서)에서 어현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죽릉2리 마을회관 가기 전 왼편(죽릉리 827번지)에 무장독립군 활동을 한 오광선 장군의 생가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도로가에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오의선 선생은 1919년 도쿄 한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돼 선포함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용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오광선 장군은 오인수 의병장의 아들로 삼악학교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듯을 품고 1918년 12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교관을 지낸 선생은 이청천과 무장독립군 활동을 벌였다.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1937년 김구 주석의 특명을 실행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형을 살았지만 출소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선생의 생가터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는 여준 선생이 설립한 삼악학교 터(죽릉리 390-1)와 3대 독립운동가 오인수·광선 기적비(죽릉리 삼조 입구)가 있다. 삼악학교는 여준 선생이 오태선, 오용근 선생과 함께 1908년 죽릉리 능말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다. 여준 선생은 원삼면 죽릉리에서 태어났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오산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다 용인에 삼악학교를 세웠다. 후에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만주사변 와중에 1932년 퇴각하는 중국군에 의해 희생됐다.

삼악학교 터에 세워진 묘석

삼악학교 터 표석은 여준 선생 탄생 150주년과 서거 80주년을 맞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2년 10월 6일에, 오광선 생가 터 표석은 3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선생 일가의 공적과 삼악학교에서 인재양성에 나선 선생의 뜻을 함께 기리기 위해 같은 날 세워졌다.

98주년 용인3·21독립만세운동에 즈음해 찾은 독립운동유적지는 향토유적이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지 않아 관리 사각지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가 지난해 5월 제정한 ‘경기도 항일운동 유적 발굴 및 보존에 관한 조례’는 용인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내 독립운동 유적지 가운데 화성에 이어 가장 많은 유산이 있는 용인시가 항일운동 유적 발굴과 보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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