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되었어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 때의 어느 식목일, 나무를 심고 싶은 마음에 멀쩡한 측백나무를 옮겨 심었다가 아버지한테 된통 혼났던 일 같은. 질경이를 알게 된 것도 그런 일들 중의 하나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나는 기차통학을 했다. 덜커덩덜커덩 느리게 달리며 역마다 멈추는 비둘기호! 통학기차가 그뿐이었던지라 중․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모두 그 기차를 이용했다. 때문에 안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차역에서, 혹은 기차 안에서 만나졌다. 시내에서 출발한 기차는 네 군데 역을 거쳐서야 우리 동네에 도착했는데 나는 종종 다른 동네 사는 오빠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그들 중 한의학을 전공하던 오빠 두어 명은 기차 안에서 나와 내 친구들에게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곤 했다.

내가 질경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 오빠들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한 오빠가 풀잎 하나를 보여주면서 부탁을 해온 것이다.

“이 풀 하고 똑같은 것 좀 뜯어다 줄래?”
“이게 뭔데요?”
“‘질경이’라는 건데 약으로 쓰는 풀이거든. 오빠가 공부하는 데 필요하니까 좀 뜯어다 줘라. 약으로 쓰긴 해도 뭐 그리 귀한 거는 아니고. 길에 나가보면 많이 보일 거다.”
흔하게 보이는 풀이다, 길가에 많이 있다, 라고 그 오빠는 얘기했지만 나로서는 처음 보는 풀이었다. 풀잎을 뜯어 소꿉놀이하며 자란 내게도 낯선 풀이라니, 귀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관심 밖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 날부터 나는 몇 날 며칠 학교 오가는 길이나 집 마당가를 살피며 질경이를 찾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동산으로 올라가 양지바른 길가에 돋아있는 질경이를 뜯기도 했다.

오빠 친구가 말해주었던 것처럼 질경이가 자라는 곳은 주로 길이다. 예전엔 산에서 길을 잃었다가도 질경이가 보이면 마을이 가까이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한다. 그래서 질경이에겐 ‘차전초(車前草)’ 혹은 ‘길의 파수꾼’이라는 별명이 있다. ‘목숨이 질겨 밟으면 밟을수록 더 잘 자라는 풀’이라는 소문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것은 질경이만의 ‘살아남기’ 수단이다. 질경이 씨앗은 물에 닿으면 부풀어 오르면서 잘 달라붙는데 그 덕분에 사람이나 동물, 혹은 차바퀴에 붙어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때 한 움큼씩 모아다 준 질경이가 어떻게 쓰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약이 되는 풀이라 했으니 약초로 쓰이려니 믿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일 덕분에 나는 질경이가 주걱처럼 생긴, 밟혀도 잘 문드러지지 않는 야들야들한 잎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풀이름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질경이만 보면 기차와, 그 오빠와, 약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약초로서뿐 아니라 나물로도, 뿌리째 뽑아서는 아이들의 제기로도 쓰이는 풀, 질경이. 볕이 잘 드는, 하지만 잦은 발길 때문에 다른 풀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길을 자기만의 살터로 삼고 있는 질경이가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오래 되어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처럼 질경이도 세상을 향해 질긴 생명을 뻗쳐나갈 준비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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