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활동가 양춘모씨를 통해 들어 본 고 이성수씨의 삶

“92년도에 처음 만났어요. 동천동 철거가 한창이었거든요. 그 때 철거민이 300명 정도 있었고 형이 대책위원장을 맡았었거든요. 화재도 3번이나 발생해 아수라장이었죠. 그 때 명지대 총학생회에 빈활을 나와 달라고 요청해 50여 명이 야학도 하면서 형과 함께 생활했죠.”
지역에서 생태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춘모씨는 용산참사현장에서 숨진 고 이성수씨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숨지기 이틀 전 만나서 나눴던 얘기를 전했다.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만났는데 많이 지쳐있었고 힘들어했어요. 형수 고생시키고 애들이 매일 싸우는 모습만 봐서 잘 못한 게 많다며 미안하다면서 눈시울을 붉혔어요. 참, 열심히  산 형인데…”

양씨는 숨진 이씨의 가정형편이 많이 어려웠지만 늘 주변사람을 먼저 챙기는 성품 때문에 막내가 어렸을 때는 우유를 몰래 갖다 놓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특히 의리가 있어 철거민 투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이 떠나질 않았다.

“형수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가 인심을 잃지는 않았구나’. TV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고 다시 모였죠.”

“이 형님은 공장을 하면서 철거민 싸움이 끝난 줄 알았지만 외국인노동자의 사고로 신봉동에 들어와 살게 됐고 또 다시 철거민 신세가 된 거죠. 다른 집은 합의해서 나갔지만 이 형님만 남아있었고 싸움의 마지막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게 됐죠. 자기 몸과 마음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찾아가 다른 사람들을 돕다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했던 이씨를 위해 용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 중이다. “살면서 형님의 정신을 이어 받는 것이 의미 있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형수나 아이들이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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