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철거민참사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수지의 마지막 철거민 고 이성수씨

▲ 고 이성수씨 가족은 신봉동 도시개발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천막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

#오열하는 아내 권명숙씨

“억울해서 어떡해요. 우리 집 양반 불쌍해서 어떡해요.…”
용산재개발 망루 농성 현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신봉동의 마지막 철거민 고 이성수(50)씨. 빈소가 차려진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부인 권명숙(47)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울던 권씨는 남편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억눌렀던 슬픔을 터뜨렸다. 숨진 이씨가 망루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신봉동에서의 고단한 삶, 그리고 그가 떠난 지금, 권씨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권씨는 지난 1월19일부터 건물 점거 투쟁에 나선 남편 이성수(50)씨를 현장에 두고 신봉동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새벽, 지하철을 타려는데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권씨는 급하게 발길을 돌려 남편이 있던 자리로 갔다. 그러나…. 남편이 있는 건물에서 새카만 연기가 치솟았고 남편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참사가 일어났던 20일 권씨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직후 화재 현장에 올라가 남편을 찾으려던 권씨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 실신했다. 병원에 실려가 저녁이 돼서야 깨어났지만, 권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편의 주검이었다. 고 이성수씨는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망루에서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다. 

#철거민이 철거민을 도왔을 뿐
21일 저녁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권씨는 “ 몸조심 하라고 하니 괜찮다면서 손을 흔들어주더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남편의 주검을 찾는 과정에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숨진 이후에도 전국철거민연합회 소속이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야 했다.

“철거민이 철거민의 아픔을 제일 잘 아는 거 아닙니까?. 우리 집 양반, 그런 사람아니예요. 개도 그렇게 죽이진 않을 거예요. 시신을 확인해 보니 만신창이가 됐어요. 그 원한 제가 풀어줄 겁니다.”

요즈음 숨진 이성수씨의 사망 원인을 두고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애 아빠는 망루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고 그 현장에서 다친 동료를 옮겼는데 5층에서 불에 타 발견됐어요. 신분증도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고 몸만 검게 탔죠. 부검도 자기들 마음대로 해 놓고, 손가락도 여러 개 잘린 채… 이를 악물었어요.” 권씨는 머리를 숙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뻥튀기 팔며 길거리서 천막생활
이들 부부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5월부터다. 신봉동에서 두 아들과 살던 부부는 당시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을 위한 철거가 진행되면서 강제철거 당한 후 공사장 앞 길거리에서 천막생활을 시작했다.

4년 전 운영하던 가구공장의 화재로 무일푼 신세가 된 권씨 부부는 거리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그러던 지난 5월 신봉동 도시개발 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권씨 부부는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았다. 천막생활은 고단하고 힘겨웠다. 권씨는 물과 전기도 없는 곳에서 자식들과 살아가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보도블록 위에 지어진 천막에는 스티로폼 위에 얇은 이불이 깔려 있었고 전기장판과 열풍기에 의지한 채 생활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권씨는 “날이 추워지면 꽝꽝 얼어붙은 물을 녹여서 씻고 그 물로 다시 밥을 해 먹고 지냈다”며 “옷가지까지 다 빼앗겨서 설에 성묘가려고 애 아빠 옷 한 벌 샀는데 입어보지도 못하고 이 일을 겪게 됐다”면서 울먹였다.

그렇게 철거민의 삶을 살았던 이 부부는 “나도 철거민인데 같은 철거민을 모른 척 할 수 있냐”며 용산재개발 철거현장에 가서 다른 철거민을 도왔다.

눈물만 흘리던 권씨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남편 없이 천막 하나에서 사는 것이 자신 없지만 죽은 남편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우리 남편이 죽었는지 용인시청에서도 알 것이다. 두 달이 걸릴지, 일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남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할 겁니다.”

“기자님 또 만나요”하며 수지여성회관 앞에서 나누던 인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한데 가족을 지키겠다며 다 무너진 집에서 쪽잠을 자던 고 이성수씨는 뻥튀기를 팔며 생계를 이어온 소박한 이웃이었다. 고 이성수씨 가족이 어떻게 쫓겨났는지, 왜 그는 그의 보금자리를 목숨 걸고 지키려 했었는지, 아마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가족이 소중하듯 그에게도 가족이 누구보다 소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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