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팎을 수도 없이 들락거리다가는 또 아랫목에 한참씩 널브러져있기도 하던 시절, 돌이켜보면 시골의 겨울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참 길었던 것 같다. 간식거리가 요즘 같지 않던 그 때, 우리는 나날이 무엇으로 궁금한 입을 달래며 살았을까.


  우리 집 뒷동산에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어린 우리가 좋아하던 나무는 높지 않아 쉽게 매달릴 수 있고 가지에 손이 닿기도 하는 키 작은 단감나무였다. 손수 거름을 한번 가져다 준 것도 아니면서 우리들은 감나무마다 하나씩 찜을 해놓고는 마치 자기나무라도 된 냥 많은 시간을 그 나무 옆에서 보내곤 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떫은 감이 열리는 나무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홍시가 될 무렵에는 장대의 움직임에 따라 목젖이 다 보이도록 고개를 젖히며 자기 몫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땡감일 때엔 올라가지도, 쳐다보지도 않고 오롯이 무시하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가 단감나무에만 붙어 놀던 사이 땡감은 할머니의 손을 빌려 변신을 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늦가을이면 속살을 드러낸 감들이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리곤 했다. 아마도 곶감이 되기 전의 떫은맛을 오빠들 중 누군가는 먼저 맛보기도 했으리라.


  그럴 용기도 없던 동생과 나는 주로 감또개를 탐냈다. ‘감또개’란 원래 ‘꽃과 함께 떨어져버린 어린 감’을 뜻하는 말인데, 얇게 썰어 절편으로 만든 감을 우리 동네에선 그렇게도 불렀다. 얇은 감또개는 감과는 달리 단맛이 빨리 배어났는데 오며가며 집어먹어본 우리가 그 맛을 놓칠 리 없었다. 우리의 입을 유혹하는 그 꼬들꼬들한 느낌이란!


  한참이 지난 겨울 어느 날이면 변신한 감이 광에서 나왔다. 뽀얗게 분이 난 곶감! 그러나 수시로 빼 먹기엔 금방 표가 날만큼 곶감도 헤프던 터라 늘 더 넉넉하게 만들어놓던 것이 감또개였다. 겨울은 길고 먹어야 할 입은 많고, 감또개마저 바닥날 즈음엔 감 껍데기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곶감 사이에 켜켜이 넣어졌던 감 껍질도 안쪽으로 하얀 분이 나 아쉬운 대로 간식거리는 되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에 친구가 김장하러 시골 갔다가 땡감을 따왔다길래 어릴 때 먹은 곶감이며, 감또개, 감 껍데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런 건 몰랐다며 감을 줄 테니 직접 만들어보란다. 생각지 않게 땡감 몇 십 개가 생겼고, 그래서 올해는 나도 곶감을 만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깎은 감을 무명실로 엮어 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곳에 매달아 두어야한다. 깎을 때 꼭지를 떼어내면 그 부분이 꺼멓게 썩기도 하고 실로 엮을 때도 불편하므로 떼지 않는 게 좋다. 3주 쯤 지나면 속이 말랑하고 겉은 쫄깃한 곶감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즈음에 옹기나 밀폐용기에 담아두면 된다. 보름쯤 지난 다음 한 번 더 꺼내서  찬바람을 쐬어주면 하얀 분이 더 많이 피고 단맛도 더 난다. 감을 얇게 썰어서 채반에 널어 말렸다가 같이 넣어두면 감또개가 된다.


  이솝우화에 <바람과 해님>이란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힘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는 바람이 해님을 얕잡아보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제안했다가 창피를 당하는 이야기. "바람아, 세상에는 힘만 가지고 안 되는 일도 있단다."라고 충고하는 해님을 보고 바람과 해님이 서로 반대되는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적도 있다. 그런데 깎은 감을 매달아놓고 보니 바람과 해님이 더불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더라! 바람과 햇볕의 도움으로 잘 말라가는 감이 마치 그림 속 한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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