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삼 한국민속촌농악단장

“나는 민속촌에서 농악과 살고 농악과 더불어 늙다가 이곳에 이대로 묻힐 거야.”

▲ 정인삼 한국민속촌농악단장
‘농악의 중시조’ ‘농악의 대부’. 사람들은 농파 정인삼 선생(65)을 그렇게 부른다. 33년간 몸담고 있는 한국민속촌농악단에서 그의 손을 거쳐 간 제자만 3000여명. 민속촌이 농악사관학교라고 지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인삼 선생은 생애의 절반을 단지 민속촌 농악단만 지키는데 바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삶과 더불어 존재해온 농악의 존재, 그 농악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가(歌)무(舞)악(樂)이 혼재된 종합예술 농악을 연주하면서 선생 역시 국악과 무용을 넘나들며 악기연주가로서 뿐만 아니라 타고난 춤꾼으로 전통예술의 깊은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호남지방의 소고춤을 집대성한 정인삼류의 소고춤과 경기지방 전통무용인 ‘진쇠춤’‘신칼대신무’ ‘승무’등을 전수받아 젊은 춤꾼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현재 사단법인 한국농악보존협회 이사장, 우리춤보전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전북 임실군 부농집안에서 어린시절 풍물가락을 들으며 자라난 선생에게 꽹과리며 소고 장구 같은 악기는 기억이 가뭇한 유년기부터 장난삼아 가지고 놀던 것들이다.

“아버지가 농악을 좋아하시고 집이 크다보니 동네 악기를 죄다 우리 집에서 보관했어. 마을에서 농악을 시작할 때는 우리 집에서부터 치고 나갔고. 다섯 여섯 살 애기때도 쓰레받기 들고 쿵딱쿵딱 같이 장단을 쳤지.”

10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농악과 더불어 상쇠춤, 소고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전주국악원에서 가야금 거문고 아쟁 등 국악기를 배웠다. 그러다 한국무용의 대가인 박금술 선생을 만나 전통무용을 사사 받았고 조선 교방청의 마지막 교수인 정자선의 아들 정경파 선생에게서도 춤을 배웠다.

그렇게 무와 악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현실은 그곳에서만 머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처럼 그도 한때 생존현장으로 이리저리 떠밀려 다녀야 했다. 몸 안에 차오른 끼를 억누른 채 조선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할 무렵, ‘운명’에 이끌려 그는 다시 농악과 만나게 된다.

74년 한국민속촌 건립과 동시에 그는 농악단을 맡았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전통문화가 낡은 고물처럼 취급되던 당시, 그는 소외돼 가고 있는 농악을 오히려 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줄곧 상쇠 농악단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생에서의 인연이 나를 농악과 살고 농악과 죽는 이 자리로 이끌었다고 생각해. 월급 받아가며 농악할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민속촌밖에 없었어. 모든 것을 접고 용인으로 내려온 그 순간 농악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렸지.”

#지방전통문화 복원 전승

그는 농악공연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복원 전승하는데도 힘써왔다. 전국 각지의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농악단을 양성하고 학교를 중심으로 각 지방 전통문화를 발굴, 복원하고 있는 것. 용인에서는 문정중 남사중 원삼중 태성중학교에서 농악을 가르쳤고 전국적으로 그가 발걸음한 학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

그가 굳이 중·고교생들을 가르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역 고유의 민속놀이와 가무를 그 지역 풍토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전승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 그는 또 그 지방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는 지역 어른들을 학교로 모셔와 아이들에게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그러면서 한 가지씩 자료를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사장 위기에 있었던 방대한 양의 지역민속예술이 모두 그의 손에 고스란히 자료로 남았다.

이같은 활동을 통해 그는 강화도 용두레질놀이와 여주 쌍룡거줄다리기를 복원, 직접 연출하여 각각 86년과 87년 전국민속예술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연달아 수상하기도 했다. 또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서 포천제일고가 모심기놀이인 포천메나리로, 광주중앙고가 광지원농악으로 작년과 올해 각각 대통령상을 안았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곧 무형문화재로 지정, 전승될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리는 것이기에 그는 연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어떤 문화든 생활 속에서 상시 호흡하는 것이 아니면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과 다름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전통예술을 가르치라고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는 나이가 들면서 춤에 더욱 몰입하고 있다.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75년 이동안 선생을 만나 경기지방 전통무를 배우면서부터. 대나무칼 끝에 한지를 맨 신칼을 들고 추는 ‘신칼대신무’와 나라 경사 때 왕 앞에서 원님들이 추었던‘진쇠춤’은 그렇게 그의 몸에서 새로 태어났다. 이동안 선생이 한 달에 한번 화성에 올 때면 좇아가 추었던 진쇠춤은 배우는데만 1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정인삼 선생은 경기도 예인들의 산실인 화성재인청의 춤을 한 가지씩 복원, 장고무 승전무 승무 태평무 살풀이 등을 젊은 제자들에게 전승시켰다. 제자 정철기 최익환 임웅수 조진형 이선영 등이 지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인삼 선생은 한번도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금도 민속촌 옆 농악단 숙소에서 단원인 20여명의 제자들과 거주하고 있다. 그래도 외롭지 않은 것은 그에겐 함께 춤추는‘새끼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망은 유능한 제자기르는 것

“난 제자라는 말을 잘 안 써. 그냥 새끼들이라고 부르지. 결혼도 하고 싶었지. 근데 조건이 하나 있어. 제자들이 밤 12시에 찾아와 문 두들기며 ‘사모님 밥 주세요’ 불러도 ‘허이고 새끼들 귀찮게 하네’ 머리 한번 긁적거리며 나가 문열어주는 여자라야 돼. 그런 사람을 지금껏 못 만난거지. 그래도 생일만 되면 여기저기서 새끼들이 한 이 삼백 명씩 모여들어 미역국에 김치라도 생일상 차려먹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제자의 조건으로 재능보다 인성을 더 중시한다는 그는 자신이 그래왔듯이 부족하더라도 노력하는 사람을 인정해 준다. 20~30년간 함께 농악단에서 동거동락하고 있는 제자들로부터 대학에서 자리잡은 이들, 농악과 춤으로 세계무대에 서고 있는 이들, 전통예술의 길에서는 떠나있지만 아직까지 그를 정신적인 지주로 따르는 제자들까지 그에겐 이들이 가족이며 재산이다.

“나보다 유능한 제자를 길러내는 것, 내 남은 소망은 이거 하나야. 절대자가 내게 전통예술인으로서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면서 ‘너 누구에게 배울래?’ 물어본다면 나는 반드시 내가 가르친 제자에게서 배우겠다고 할거야. 지금도 가르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내 제자로 온건 아닌가 하고. 인연은 다시 맺어지게 돼 있거든.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 될 거고 농악을 할 거야.”

반평생을 용인사람으로 지내오는 동안 지역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했어도 그는 용인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세계인이 모여드는 곳,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무대인 민속촌이 있고 농악을 통해 이루어야 할 평생의 사명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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