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규 용인시서북부장애인복지관 관장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특히 복지관으로 출근할 때가 가장 행복하죠. 이번 추석연휴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했어요."

▲ 임혐규 용인시서북장애인복지관 관장

용인시서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 시설 구석구석에 임형규(47) 관장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은 없다. 올해 10월14일자로 이제 개관 첫돌을 맞은 신생 복지관이지만 지역에서 장애인복지와 문화활동의 장으로 든든히 자리를 잡은 데는 임 관장의 공로가 컸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기 위해 18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제 발로 박차고 나왔다는 그, 대기업에 근무했던 퇴직 전 연봉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지금의 자리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는 그는 그 열정을 복지관에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다. “저는 직원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돈 받지 않고 자원봉사도 하는데 너희들은 봉급 받고 보람 있는 일 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패기와 추진력, 그리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복지관을 이끌고 나가고 있는 임 관장에게는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지체3급 장애의 그늘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장애는 다만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관념조차 그에게는 무의미해 보인다. 장애를 입고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행복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에게는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운명인지도 모른다.

▲ KBS 고민정 아나운서가(왼쪽에서 세번째) 서북부장애인복지관 제2대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오른쪽 두 번째가 임형규 관장

▲ 군복무 중 지뢰사고로 장애

그에게 장애를 가져다준 사건은 82년7월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났다. 81년 안동대 1학년을 휴학하고 입대한 그는 당시 육군 제12사단 수색대대에 소속돼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근무 중 지뢰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함께 수색에 나섰던 9명 중 6명이 숨졌다. 살아남은 3명 가운데 그가 있었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지뢰 파편이 박힌 다리는 아홉 번의 수술을 시도했어도 온전해지지 않았다. 좌절과 방황의 날들, 하지만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국가유공자로 전역했다.
그러나 지금도 몸속에 박혀 있는 수 천 개의 파편조각은 궂은 날이면 통증을 몰고 온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장애인들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참 이상한건 제 형제가 모두 5남매인데, 그 중 4명이 장애인이에요. 한 살 위인 누님이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였고 저를 비롯해서 3명이 산재 등으로 후천적인 장애인이 됐죠.”

소아마비를 앓던 누이에게 동네아이들과 몰려다니며 흙을 퍼붓고 놀려대던 그였다. 누이의 가슴에 아픔을 주었던 그가 이제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삶을 생의 가장 큰 사명으로 여기며 산다. 그는 누님의 딸을 어엿한 사회복지사로 키워놓았다. 그리고 그의 장남 종명씨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현재 루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다.

“관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저희 부모님을 복지관에 모시고 왔는데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어렸을 때부터 불쌍한 사람들 데려다 살거라고 하더니 이제 그 길로 들어섰다’고 하시대요. 사실 저는 그런 말 했던 기억조차 없거든요. 인정 많은 어머니를 보며 자랐던 것이 저도 모르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나누는 삶이 즐거운 것도 어머니께 물려받은 천성 같아요.”

그의 어머니 김석봉(79) 여사는 그에게는 인생의 스승이다. 경북 영주에서 보낸 어린시절 그의 어머니는 비단장사며 막걸리 장사로 5남매를 키워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살림살이에 들어오는 수입보다 외상이 더 많아 늘 생계 걱정이 떠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밥 굶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거지가 지나가면 불러다 먹이고 입혔다.

그는 장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말하곤 한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나보다 건강한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짓지 말고 더 큰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면 나눌 것이 생기는 법이다. 그의 어머니처럼. 임형규 관장은 내년에 팔순을 맞는 노모에게 바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써놓았던 글을 모으고 지나온 삶의 여정을 엮어 에세이집을 낼 계획이다.

그에게는 또 하나 꿈이 있다. 그 꿈을 위해 그는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다. 바로 사회복지법인 시설을 만들어 두 아들과 함께 오갈 데 없는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이다. 이미 법인의 이름도 정해두었다. 사회복지법인 ‘석봉’으로.

▲  문화활동 통해 어울리고 융합

기업체에 근무하던 당시에도 그는 분주한 시간을 쪼개 장애인들을 위한 서부상담소를 운영해 왔다. 그때 만났던 어려운 이웃들이 지금은 복지관에서 재활을 꿈을 일구고 있다.

서북부복지관을 찾는 인원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망라하여 하루 350~4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서북부지역 장애인의 10%만이 복지관을 이용하는 현실에 대해 그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교통편만 가능하다면 더 많은 장애우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셔틀버스 증편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다이어리는 업무관리에 관한 사항으로 매일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1년간 그렇게 열성을 쏟은 만큼 다양한 성과도 거뒀다. 재가장애인들을 위한 복지봉사센터 개소와 후원, 각종 문화교실과 취미강좌, 여성아카데미 등 복지와 문화는 물론이고 KBS 박선규 기자와 고민정 아나운서를 서북부장애인복지관 홍보대사로 위촉,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내는데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문화활동을 통해 서로 어울리고 융합하는 문화를 일구어내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스포츠댄스 요가 컴퓨터교실 등 우리 복지관에서 이뤄지는 모든 강좌에는 장애 비장애 구분 없이 지역주민들이 같이하고 있습니다. 복지관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만들어 가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의미가 큽니다.”임 관장은 장애인들이 현재 직면한 절박한 문제로 취업과 결혼을 꼽았다. 특히 장애인 취업은 일자리 공급도 문제지만 한달 평균 60~70만원에 해당하는 저임금이 걸림돌로 작용되고 있다는 것.

그는 복지관이 갖고 있는 두 가지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는 장애인 합동결혼식을 주선하는 것. 또 한 가지는 장애인에서 나아가 결혼이민자들을 위한 복지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타국에서 시집온 여성들에게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쉼터와 문화 교양교육 프로그램을 제공,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민자들이 각 나라별로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은 것이다.

“단 하루를 근무하더라도 복지관에 저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내 욕심을 챙기지 않고 직원들을 먼저 챙겨주려고 해요. 복지관 발전에 초석이 되는 관장이 되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복지관에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 관장실 앞 액자에 걸려있는 그의 글이 관장 임형규를 말해주고 있다. “밤하늘에는 별이 있어 빛나고 땅위에는 꽃이 있어 아름답고 제 곁에는 여러분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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