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길에 담아온 아름다운 들녘 풍경

오마이뉴스 임윤수(zzzohmy) 기자
▲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지만 다랑논에도 가을은 익어가고 있습니다.
ⓒ2004 임윤수
성인이 되면서 이맘때면 숙제처럼 꼭 해야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선산에 있는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는 일입니다. 평소 왕래가 뜸한 곳에 산소가 있다보니 찾아가는 길 자체가 고행입니다.

▲ 하얗게 피었던 박꽃도 이젠 대롱대롱 매달린 조롱박이 되었습니다.
ⓒ2004 임윤수
키만큼 자란 억새풀이 얼굴을 스치기도 하고 예기치 않게 윙윙거리는 벌떼에 놀라 줄달음을 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농작물들은 비료를 주고 정성을 주어도 결코 만족스럽게 자라지 않는데 그놈의 잡풀들은 왜 그렇게 무성한지 모르겠습니다.

▲ 그 신맛에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산수유도 차츰 가을 색을 입어갑니다.
ⓒ2004 임윤수
농작물들은 농약을 치고, 풀을 깎아 주며 보호해도 병들기 십상인데, 잡풀들은 지나간 태풍에도 아랑곳없이 웃자라 어른 키만큼이나 위로 솟아있습니다. 어렵사리 산소에 도착하면 봉분을 시작으로 벌초가 시작됩니다.

▲ 빨갛게 익은 산열매가 왕관을 썼습니다.
ⓒ2004 임윤수
예전에야 쪼그려 앉아 낫으로 하나하나 깎아야 했지만 지금은 예초기라고 하는 기계로 대신하니 전통적 벌초도 기계화된 셈입니다. 서툰 솜씨로 윙윙거리는 기계를 들고 무성한 잡풀들을 깎아낸다는 건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지만 다 깎고 말끔해진 산소를 돌아보면 자손 된 도리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짐을 느낍니다.

▲ 습기가 넉넉한 개울가엔 영락없이 여꾸대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꽃이 마치 물감을 덮어 쓴 깨알 같습니다.
ⓒ2004 임윤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내고 났을 때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일상의 하나가 바로 벌초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조금의 여유를 가진다면, 벌초를 하러 나서는 길이 결코 자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익어 가는 가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요.

▲ 웃자란 코스모스들이 가을 바람에 살랑대듯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2004 임윤수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설익은 가을이지만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을 색이 가슴을 부자로 만들어 줍니다. 파란색 일색이던 들녘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열매들이 보입니다.

▲ "아사삭~" 대추의 단맛과 씹는 맛에 꼴깍하는 소리가 나도록 침이 꿀떡 넘어갔습니다.
ⓒ2004 임윤수
어릴 적 장난 삼아, 먹거리 삼아 했던 콩서리를 떠올리는 콩밭을 지날 땐 문득 다시 한 번 '콩서리'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깁니다. 그러나 인심이 변한 건지 마음이 변한 건지 차마 콩서리를 하진 못했습니다. 기억 속에서만 그 고소했던 콩 맛이 맴돌고 숯검정에 시커매진 친구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 주렁주렁 달린 감도 누렇게 익어갑니다. 무서리가 나리고 찬바람이 불면 빨간 홍시가 될 감들입니다.
ⓒ2004 임윤수
봄 들녘이 가볍고 화사한 컬러였다면 가을 들녘은 왠지 묵직하고 듬직한 그런 컬러입니다. 봄 나무가 꽃으로 그 화사함을 연출했다면 가을 나무에선 그 열매가 풍성함을 연출합니다.

아직은 푸른빛이 남아있는 넝쿨에 매달린 조롱박과 야금야금 익어 가는 누런 빛 땡감에도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싱겁게 크기만 한 코스모스가 살랑대는 바람에 하늘거리듯 몸을 흔들어 댑니다.

▲ 어릴적 서리로 익혀서 그 맛을 압니다. 불에 구워먹으면 정말 맛좋은 콩입니다.
ⓒ2004 임윤수
벌초를 마치고 떠나올 무렵에서야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았습니다. 허수아비가 한 마디 하는 듯 합니다. "여보게! 고향이 좋긴 좋지? 땀은 흘렸어도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주니 말일세. 며칠 있다 또 오게. 그때쯤이면 농익은 가을이 자네에게 뭔가를 푸짐하게 줄 테니 말일세"하고 말입니다.

▲ 고향 들녘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는 마음 속에 있는 또 한 명의 고향 아저씨일지도 모릅니다.
ⓒ2004 임윤수
며칠 남지 않았지만 추석이 기다려집니다. 그 기다림 속엔 농익은 고향의 가을에서 얻을 그 뭔가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2004/09/20 오후 1:40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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