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용인 출신 이일장군을 재조명하다
학술세미나 및 기념사업회 창립…초대 이사장 홍순석 교수
묘역 도지정문화재 승급 추진 등 현양사업 본격화 하기로

용인 출신이자 용인에 영면한 조선중기 명장, 장양공 이일장군(1538~1601년)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향후 선양사업을 위한 기념사업회 창립행사가 지난 29일 용인시청 문화예술원 3층 국제회의실에서 마련됐다.

지난 29일 용인 출신 이일장군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향후 선양사업을 위한 기념사업회 창립행사가 열렸다.
지난 29일 용인 출신 이일장군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향후 선양사업을 위한 기념사업회 창립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연구자와 일반 시민 그리고 용인이씨 종중원 등 약 200여 명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백규 장양공종회 회장은 개회식 환영사를 통해 “용인 포곡의 신원리에서 태어나신 이일장군은 평생 전장을 누비며 무공을 세운 참다운 무장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후손으로서 못내 안타깝다”며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 바로잡히고 재평가의 시발점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학술세미나에 이어 진행된 ‘장양공 이일장군 기념사업회’ 창립식에선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가 초대 이사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돼 2년 간 이끌게 됐다.

현재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소재 이일장군 묘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21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으나 주변은 신설 고속도로 진출입로 공사 등으로 환경훼손 위기에 처해 있는 등 선양사업을 통한 체계적 관리가 필요한 실정이기도 하다.

다음은 장양공 이일장군 학술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논문과 토론을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편집자

1주제 : 고문헌을 통해 본 장양공 이일장군 재조명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

장양공 이일장군의 평가에서 상반된 견해가 제기된 ① 녹둔도 침입사건 ② 상주‧충주 전투에서의 패주(敗走), ③ 정평(定平)에서의 죽음에 대해 고문헌을 통해 살피고, ④ 증작(贈爵)‧증시(贈諡)에 대해 정리했다.

이일장군에 대한 평가는 이순신, 신립 장군과 맞물려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해전에서 승리하고 죽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주 전투에서 패하고 죽은 충장공 신립 장군, 패하고도 생존한 장양공 이일장군이라는 사실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대비되고 있다.

전란 중에 생존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헌신한 장수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이다. 상주와 충주지역에서의 ‘패주’와 ‘패배’가 빌미가 돼 자양공 이일장군의 국지적 전공(戰功)은 묻혀버렸고, 이후 역사적 평가도 인색했다.

이일장군이 상주‧충주의 전투에서 비록 패주했지만, 여러 난관 속에서도 첩계를 전해 전황을 보고한 사실은 조정에서 대처하는데 매우 필요하였던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조가 여러 권신들의 무고에도 불구하고 이일장군을 신뢰하고 총애했다는 사실도 중시된다.

특히 이일장군 사후 121년 뒤인 1722년(경종2)에 사간원 완의로 ‘장양공’이란 시호를 추증한 사실은 기존의 공과를 아우른 최종의 평가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증시된 이후 3백년이 지났지만 이일 장군의 묘역 앞의 ‘어마총’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마총은 이일 장군이 해현령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으로 선조가 하사한 어마의 무덤이다. ‘어마’ 콘텐츠는 장양공 이일 장군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휘하 장수의 순절에도 불구하고 ‘패주’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수장의 고뇌는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완벽하다.

장양공 이일장군의 콘텐츠 개발을 위해, 우선적으로 산재한 고문헌 기록을 수집 정리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장양공 이일장군 문헌록> <장양공 이일장군 평전> 등을 출간해야 할 것이다.

토론 : 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회장

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회장
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회장

임진왜란에서 이일장군이 패전한 세 전투로 공을 평가하는 것은 균형 잡힌 공적 평가가 아니며 다음 공적을 참고해 장양공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

△장양공이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해유령전투에서 왜적의 수급 30급을 벤 공로로 임금이 내린 어마를 하사받은 사실 △평안병사로 제수되어 순안에 주둔, 많은 전공을 세운 공로로 백금 20냥을 하사받은 사실 △세자 광해군을 3천명의 군사로 시위한 일. △평양 왕성탄전투에서 왜적 80여 명을 사로잡은 공 △동변방어사가 돼 임진강·평양 등을 방어한 일 △평안도병마절도사 때 명나라 원병과 평양을 수복한 일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 유지에 힘쓴 일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좌지사로 군대를 훈련한 일 △병서인 『증보제승방략』을 편찬해 군중에 배포, 교재로 삼게 한 일 등 공의 공적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작업이 필요하다.

2주제 : 이일장군의 시전부호 전투와 후대의 선양사업

김성환 전 경기도박물관장

18세기 초 이일에 관한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이 추진되었다.

문중 차원에서 그것은 이일의 신원 차원에서 접근되었지만, 당시의 숭명반청 및 조선중화주의를 담론으로 하던 노론의 정치적인 이해와 맞물려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송시열의 문인인 이담이 이일의 행장을 찬술하고, 〈경흥파호도〉를 〈토멸시전부호전도로 명명한 것은 재평가 작업의 시작이었다.

이를 토대로 문중에서는 조정에 이일의 시호를 요청해 ‘장양공’이란 시호를 하사받았다. ‘장양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 전반 역사적인 재평가의 공식적인 결과를 반영한 것이고, 제목에서 ‘전’이 삭제된 것은 ‘정토’라는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잔존하는 이일 관련 자료들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부정적으로 평가된 그의 삶을 공식적으로 재평가받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향후 현양 사업에 대한 일정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여러 곳에 분산되어 보존되고 있는 자료들의 현황을 조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소재가 불명인 시호교지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둘째, 신도비명의 재건립에 대한 문제이다.

현재는 1984년에 찬술된 신도비명으로 건립되어 있는데, 18세기 전반 찬술된 3명의 신도비명 중 하나로 새로 건립될 필요가 있다. 셋째, 《제승방략》과 《장양공전서》의 국역에 대한 문제이다.

이 자료들은 일찍이 국역되어 이 분야의 연구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21세기 전반의 대중적인 언어 감각에 맞게 번역되어 제공될 필요가 있다. 넷째, 이일 장군이 여진 세력과 전투를 벌였던 현장을 답사하는 문제이다. 시전평과 녹둔도 등이 그곳이다.

현재 녹둔도는 북한과 최접경인 러시아의 변경에 위치하여 접근이 가능하지 못하지만, 시전평은 바로 인근인 하싼까지 답사가 가능하다. 답사를 통해 이일 장군의 활동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토론: 김태근 전 용인학연구소장

김태근 전 용인학연구소장

부정적 평가는 <선조실록> 뿐아니라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에서도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이일이 속한 당파는 서인이기 때문에 광해군 시기 북인이 편찬을 주도한 <선조실록>에서는 폄하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인조반정 후 <선조수정실록> 편찬은 서인이 주도했기 때문에 이일장군에 대한 평판이 다소간 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서 이일장군에 대한 평판에 대한 차이가 있었다면, 17세기 이후 후손뿐 아니라 노론 세력에 의한 현양 사업과 장양공 증시의 정당성 확보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일장군의 묘역이 현재 용인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향후 승급하여 경기도 차원의 문화유적 지정을 추진한다. 경기도문화유적 이상으로 승급하기 위한 요건을 갖추기 위해 추진해야 할 일을 제시해 달라.

3주제 : 장양공 이일장군 행적에 관한 오해와 진실

정성희 전 경기도 실학박물관장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불멸의 이순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녹둔도 전투의 책임은 이일이 장수로서 무능해 녹둔도에 병력을 더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닌, 당시 조선의 함경도 방어 전략 자체가 대규모 병력을 상시 주둔시키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제승방략>의 전략을 고수한 이일 입장에서는 병력 충원에 대한 지원을 외면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병력 충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이순신의 항의는 어디까지나 일선에 나간 현장 지휘관의 의견이다. 오히려 제때 지원 병력이 도착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제승방략은 실패한 전법인가? ‘제승방략’이란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들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지정된 방위지역으로 가서 서울에서 파견된 장수나 그 도의 병·수사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전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방지역 군사 없이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를 막을 방도가 없으므로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한 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승방략은 유성룡이 말하는 진관체제의 대체가 아니다.

이일이 올린 장계의 핵심은 함경북도 6진에 전쟁이 발발하면 6진 5위로 분군, 대처하고 3읍(경성·명천·길주)에 적변이 발생하면 삼읍삼위로 분군해 처하게 하는 것이다. 북방 여진족을 상대로 한 국지전에서는 유리한 전술이다. 다만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전쟁에서는 불리하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일찍 도착해 <제승방략>의 대분군법에 따라 경상도 지역의 군사와 함께 총공격했다면, 고니시 부대를 충분히 저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일이 오합지졸 군사로 시간이 지체되어 상주에 늦게 도착하자 그를 기다리던 지역 병사들이 흩어져 버린 것이 상주 북천전투의 결정적인 패인이다.

토론 : 이승원 수원대 사학과 객원교수

이승원 수원대 사학과 객원교수

역사라는 학문이 당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 의한 해석의 근거해 학문적 평가가 축적된다는 점에서, 역사 속 인물 평가가 한쪽 방향으로만 ‘소비’되는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표문은 의미가 있다.

이일장군의 정치적 경향성에 대하여 선조실록은 광해군 당시 북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 의해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인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실록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경향성과 상관없이 당대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 이일장군 관련 연구 중에서 고고미술사학과에서는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연구」라는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시호를 받은 1745년에 이일에 대한 조정의 입장은 ‘우호적’이며, 오늘날의 ‘부정적’이미지와는 달랐다고 읽혀진다.

이러한 관점이 의미 있다면 이일 장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나 북방정책에 대한 연구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정리 우상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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