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보니 앞집 지붕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장독 뒤에 핀 노란 산국화 향이 뜰 안을 뒤덮어서 저물어 가는 가을을 알린다.

처인구 원삼면 용담저수지 연리목
처인구 원삼면 용담저수지 연리목

부지런한 남편은 서리 오기 전 고춧대를 뽑았다. 필자도 남편 따라서 가을걷이로 바쁘다. 고춧잎을 따서 일부는 소금물에 삭히고, 나머지는 삶아서 말렸다.

고추는 다 따서 절반가량 바늘구멍을 내어 소금물에 삭혀서 장아찌 만들 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가위로 반을 갈라서 속을 파낸 뒤 밀가루를 묻혀 쪄서 말렸다. 고추부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고도 남은 연한 고춧대와 고춧잎은 아까워서 전부 잘라 큰 통에 설탕을 넣고 고추청을 담갔다. 건더기를 걸러 낸 고추청을 음식 만들 때 넣으면 감칠맛을 끌어 올린다. 텃밭에서 기른 농작물은 무농약에 가까워서 조금이라도 버리기 아까웠다.

10월 하순경 캔 고구마는 상자에 담아 고구마를 보관하는 데 최적의 장소인 2층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놓았다. 고구마 보관은 아주 까다롭다. 너무 따뜻한 곳에 놓으면 싹이 나고, 추운 곳에 놓으면 얼어서 썩는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알아낸 장소이다. 고구마 상자 옆에는 미용실 사장님한테 얻은 글라디올라스 구근과 다알리아와 칸나 뿌리를 캐어 함께 보관하려 한다. 텃밭 농사를 지으면 깔끔한 집안 정돈은 사치일 뿐이다.

우리 집과 옆집 사이 창고 벽에 있는 빨갛게 물든 담쟁이덩굴 잎은 며칠 사이에 다 떨어졌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게 하는 계절이 왔다.

잎이 떨어진 담쟁이덩굴
잎이 떨어진 담쟁이덩굴

병든 한 여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친구와 아픈 여인의 희망이었던 마지막 잎새를 밤사이 벽에 그려 놓고는 세상을 떠난 노화가의 사랑, 그 옛날 사춘기 어린 가슴을 흔들었던 추억의 담쟁이덩굴이다.

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의 뿌리를 보면, 오징어 발에 달린 빨판 모양 같기도 하고 청개구리 발가락을 닮기도 했다.

담쟁이덩굴은 흡반 모양의 뿌리를 이용해서 나무가 아닌 벽이나 담을 오를 수 있다.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칡은 자신이 감고 의지하는 나무와 생존경쟁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담쟁이는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위로 오르다가 가끔 옆으로 줄기를 뻗어서 자라기도 하는데, 이슬이나 빗물을 보관하려는 담쟁이의 뛰어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높다란 담 위에 올라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고 있지만, 묵묵하게 비밀을 지켜주는 담쟁이덩굴의 묵직함이 대견하다. 뜨거운 담 위에서 긴 여름을 견디고 붉게 물든 잎을 떨구어 내며 긴 쉼을 시작하려는 담쟁이덩굴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며칠 전 아침엔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만나러 남편과 용담저수지(처인구 원삼면 사암리에 있는 농업용저수지) 둘레길을 걸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조금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데, 지금은 쉽게 오르지만 걷기 초보일 때에는 중간에 한 번 쉬고도 숨을 헐떡였다. 그 언덕길 옆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줄기를 서로 기대며 한 나무처럼 살고 있다.

이런 나무를 연리목(連理木)이라고 부른다. 지형으로 보아 서로 붙들거나 기대지 않았다면 두 나무 모두 비바람에 쓰러졌을 것 같았다. 사이좋게 얼싸안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연리목을 응원하려고 지날 때마다 가끔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이 연리목은 결혼한 지 40년을 훌쩍 넘긴 우리 부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긴 인생의 여정을 힘들 때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기에 함께 행복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황혼기에 접어둔 우리 부부가 젊은 시절 행했던 탁월한 선택은 결혼이었다. 서로가 선택한 것에 따르는 무한 책임을 졌기에 삶의 고단함도 참아내야 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바람에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배려해 주는 반려자의 힘이 아닐까?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가을이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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