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기세가 등등하던 여름은 기운을 잃어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

고향을 떠올리게하는 고마리 모습
고향을 떠올리게하는 고마리 모습

길옆 개천을 덮을 만큼 넓게 핀 고마리는 연분홍 별들이 쏟아져 내린 듯 예쁘다.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다는 고마운 작은 풀을 ‘고마워 고마우리’ 하다가 고마리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도 그럴 듯하다.

고마리 앞에서 구부려 앉아 고마리꽃이랑 눈높이를 맞추어 보고 있자니 그 속에 비치는 필자의 고향 동네가 떠올랐다.

먼 옛날, 고향 집 바가지 우물 아래 물 내려가는 쪽으로 고마리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찌나 무성한지 물길은 보이지 않고 고마리만 보였다.

동네 아저씨들이 고마리 아래쪽에서 송사리와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는데, 건져 올린 소쿠리에 물고기가 몇 마리씩 잡힐 때마다 환성을 지르던 모습이 고마리꽃 속에서 보였다.

어머니가 시키지 않았는데, 칭찬받고 싶은 어린 딸내미는 마중물을 넣으며 힘을 주어 퍼 올려야 하는 집안 펌프 물을 뒤로 하고, 집 앞 오솔길 아래 바가지 우물로 가서 걸레를 빨아 방 청소를 자주 했다.

어설픈 빨래 방망이질 소리와 작은 손으로 꼭 짠 걸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도 고마리꽃 속에서 들렸다.

추석이 다가오면 학교가 끝나는 오후, 친구들과 작은 동산으로 가서 솔잎과 쑥을 뜯어 어머니 바쁜 일손을 도왔다. 어머닌 딸내미가 캐온 쑥을 방앗간에 가서 쌀과 섞어 빻아 오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익반죽을 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콩은 쑥을 넣은 쌀가루에만 넣고, 깨나 팥은 치자 물들인 노란색과 흰색 송편에만 넣어 색깔로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표시가 나게 했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어머니 말을 듣고 열심히 정성 들여 만들어도 딸내미는 못난이 송편을 만들어 속상했다.

“내년에 손이 더 커지면 예쁘게 만들 수 있다”는 어머니 위로를 받으며 예쁜 딸을 낳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았던 고마리 속에 비친 작은 딸내미가 귀엽다.

필자 꽃밭에 핀 과꽃
필자 꽃밭에 핀 과꽃

솔잎을 켜켜이 넣은 커다란 시루에서 송편이 익어갈 때를 기다리던 딸내미에게는 송편 먹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 있었다. 환하게 비치는 팔월 열 나흗날 달빛과 친구 되어 어머니가 접시에 담아준 송편을 이웃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온 동네를 뛰어다니는 일이었다.

이웃집 대문 밖에서 “떡 가져왔어요” 외치는데, 신이 난 아이는 대문이 열리면 어른들에게 인사 먼저 드리라는 어머니 당부의 말은 잊어버렸다. 이웃이 밤이며 과일을 접시 위에 올려주었는데, 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었던 고마리 속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송편 돌리러 뛰어다니던 딸내미는 어느새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되어 고향 집 마당에 지천이었던 과꽃을 매년 심어 꽃밭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엄니(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지치도록 더운 여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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