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점점 선선해지면서 마을은 김장 준비를 시작한 지 오래다. 동네 어르신들이 감자밭을 정리한 자리에 심어놓은 김장 배추 잎사귀는 벌써 손바닥보다 커져 있다. 배추 옆에 정겹게 심은 김장 무 싹도 무럭무럭 올라오는 중이다.

김장을 위해 심은 배추
김장을 위해 심은 배추

새벽 일찍부터 집 앞 하우스에선 노부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올해 마지막인 듯한 고추를 정리하고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제 할 일을 다 한 고추포기는 미련 없이 뽑혔다.

마을 입구에선 고구마를 캐고, 마을 회관 앞에 있는 벼 건조기에는 올해 수확한 벼를 말리기 위해 트랙터로 나르고 있었다.

가을장마가 끝나자마자 조금은 늦게 시작한 듯한 잡초를 정리하는 예초기 소리는 점심이 지나도록 멈추질 않았다. 필자도 텃밭의 호박과 가지를 수확하고, 마당 잡초를 정리한 뒤 웃자란 잔디를 깎았다.

그러고 나선 수국 가지치기와 예쁘게 핀 세이지 꽃들을 눈에 잘 띄는 자리로 옮겨 심었다. 여름 동안 광합성을 끝내고 갈색으로 변한 꽃들과 나무들의 잎을 정리해주고 나니 각종 꽃의 씨를 받아야 할 일이 보였다.

건설 현장이나 커다란 공장에서나 보이는 근사한 노동은 아니지만,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노동 현장을 마을 여기저기에서 매일매일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 입장에서 인공지능, 빅데이터라는 말을 써가며 4차 혁명 시대니 뭐니 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너무나 단순한 노동의 가치평가는 다 소화하지 못할 만큼 풍성한 농산물과 멋진 마당이라는 결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과연 그 수확물의 결과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충분한 대가인지 말이다. 이와 함께 한여름 낮과 겨울을 제외하곤 항상 무언가 하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진다.

가장 가까운 남편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생계만 보장된다면 당장이라도 직장(또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 두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노동은 우리가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자아실현을 위한 가치 있는 일이라기보다 단지 돈이나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할 일을 다 하고 뽑힌 고추 줄기
할 일을 다 하고 뽑힌 고추 줄기

어쩌면 노동의 가치가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적어도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여전히 동네 사람들이 모여 봄에는 못자리를 만든다. 여름에는 장마 대비와 제초를 하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나누는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을 대소사가 있을 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노동을 보탠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과거엔 건강을 위해 음식을 굶고 무거운 것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등의 행위는 비상식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 운동이라는 단어로 칭해지는 것처럼, 적어도 이곳에서의 노동은 가족 간 연대, 즐거움, 친근함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로 보여지기에 필자도 동참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는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은 곧 돈’이라는 관념으로, 노동의 종류보다 가치 있는 노동을 선택하기 위해 경쟁에 익숙해진 자신과 타인을 소외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계속해서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사회 변화를 인정하고, 계속 진화하여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오래전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노동은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노동의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로 미래에는 생존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은 기우였길 바란다. 노동에 대한 의미가 다시 자아실현 또는 유대관계 유지의 의미로 바뀌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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