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이른 새벽이지만 조금만 걸어도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덥다. 지난밤 열대야에 잠 못 이룬 매미들도 짜증이 났는지 일찍부터 울어댔다. 요즘 숲길에는 덩굴식물들이 한창이다.

산책길에서 만난 박주가리 꽃.
산책길에서 만난 박주가리 꽃.

덩굴식물은 줄기나 덩굴손으로 다른 식물이나 지지대가 될만한 것에 기대며 자라기도 하고, 곁가지 등에 흡기를 만들어서 다른 식물에 붙어서 살기도 한다.

논둑길에는 가늘고 연한 덩굴이 기다랗게 자란 쑥대를 의지하며 핀 분홍색 메꽃이 보였다. 메꽃은 우리들의 어릴 적 달콤한 간식거리였다. 이른 봄이 되면 메가 살고 있었던 곳을 기억했다가 싹이 나기 전 땅을 파면 하얀 메꽃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메꽃 뿌리를 캐서 물에 헹구어 먹으면 맛이 달짝지근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꽤 있었다. 설탕이 귀했던 시절 어머니는 절구에 쌀가루를 빻아서 설탕 대신 메꽃과 훌훌 섞어서 시루에 쪄 주셨는데, 달콤하고 쫀득한 메꽃 떡 맛을 지금의 그 어느 떡과 견줄 수 있을까?

요즈음 숲길을 걸으면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길을 멈추게 한다. 박주가리꽃이다. 분홍색인 듯 보라색인 듯한 별을 닮은 박주가리꽃이 더위에 지친 8월의 숲에선 으뜸인 것 같다. 박주가리는 덩굴로 감싸 안으며 의지한 식물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키 큰 망초 대 위에 핀 박주가리꽃은 망초꽃인 줄 착각할 정도다. 박주가리 잎이나 줄기를 잘라보면 하얀 즙이 나오는데, 여기에 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포식자들의 먹잇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독성의 즙을 만든 것 같다.

그런데 독을 아랑곳하지 않고 박주가리 잎에 알을 낳는 곤충이 있는데, 바로 왕나비이다. 박주가리 잎을 먹고 자라는 왕나비 애벌레는 독성을 축적하게 되고, 그 독성을 갖고 어른이 된 왕나비는 천적인 새들의 먹잇감에서 제외된다고 하니 자연의 세계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신비롭기만 하다.

논둑길에 핀 분홍빛 메꽃
논둑길에 핀 분홍빛 메꽃

사위질빵 줄기도 길가의 철쭉을 뒤덮었다. 사위질빵꽃은 꽃잎은 없고 수술과 암술, 꽃받침으로 이루어졌다. 멀리서 보면 하얀 꽃잎으로 보인다.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물건을 나르는 수단으로 지게가 있었다.

지게는 어깨에 지고 다녔는데, 양쪽 어깨에 걸치는 것을 질빵이라고 불렀다. 질빵을 만들 땐 웬만해선 끊어지지 않는 칡 줄기 껍질을 사용했다. 무거운 짐을 지면 어깨가 아플까 봐 짚을 칡으로 엮어 만들었다. 질빵의 생명은 무거운 물건을 져도 잘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어느 마을에 처가 일을 도우러 온 사위가 짊어질 지게의 질빵을 장모는 약하디약한 덩굴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거운 물건을 지면 금방 끊어져서 일을 오랫동안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덩굴식물을 사위질빵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장모의 딸 사랑이 사위에게 이어진 애틋함이 묻어있는 식물이다.

우리 집도 딸 가족이 놀러 오는 날이면 으레 슈퍼에서 장을 보는데,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 재료에 손이 먼저 가게 된다. 시대가 변해도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폭염과 긴 장마로 칡, 환삼덩굴, 가시박 같은 덩굴식물이 올해는 유난히 번성해서 둑길 언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덩굴식물 아래 어두컴컴한 곳에서 사는 식물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우리 부부는 전원에 살면서 많이 배운다. 자연에서 겸손함을 배우고, 고마움을 일깨워주는 스승과 같은 곳이 전원이다.

올여름은 무척 덥다. 이제 처서도 지났으니 기승을 부리는 더위가 서서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과꽃, 맨드라미, 백일홍, 나팔꽃이 형형색색 꽃을 피운다. 먼 옛날 고향 집 꽃밭처럼. 서서히 8월도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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