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독립운동 후손들과 함께 지난달 25일 타지역 독립운동기념관을 견학하며 용인지역의 독립운동 선양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일제가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지목한 안성 지역의 3.1운동 기념관을 시작으로 역사마을을 거쳐 천안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안성 3.1운동 기념관-“부러움과 부끄러움은 우리 몫”

안성 3.1운동 기념관
안성 3.1운동 기념관

구름이 하늘에서 유유히 노닐고 있는 5월의 아름다운 아침, 하늘은 맑았다. 놀멍, 쉬멍을 기대하며 다른 지역의 사례를 씨앗으로 삼고 싶은 욕심도 있는 길이었다.

안성 원곡면 만세로 3.1운동 기념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큐티한 큐레이터는 개관 시간 전에 도착한 손님들을 맞기 위해 선배들의 손에 밀려 내려온 막내인듯했다. 그의 큐티함은 비장한 각오와 무게감 있는 독립기념관 큐레이터에 대한 선입견 있던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며, 안성의 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안성 독립운동가의 위패가 모셔진 ‘광복사’로 안내했다.

실내에 마련된 전시실은 안성이 일제 식민통지 기관을 완전히 몰아낸 ‘2일간의 해방’을 타이틀로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독립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시장 전문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안성이 왜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지목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전시장 안쪽에서는 300여 명의 안성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용인의 독립운동가인 임옥여, 남정각, 정철수를 비롯한 다수의 인물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출생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안성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선열을 기리는 그들의 포용에 놀랐고 용인지역 선열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움이 순간 몰려왔다. 남의 제사상에서 우리 조상 영정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아울러 우리는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음에도 전시관과 기념관 하나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고 안성 시민이 무척 부러웠다. 박은식이 ‘한국통사’ 서문에서 정신인 역사가 보존되어 있으면 형체인 나라는 부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기념관 하나 없는 용인이 어떠한 방법으로 그 정신을 보존 가능케 하며 부활을 꿈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한다.

안성 독립운동역사마을-독립운동은 테러인가

지난달 25일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 후손들과 함께  타지역 독립운동기념관을 견학했다.
지난달 25일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 후손들과 함께  타지역 독립운동기념관을 견학했다.

기념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안성독립운동역사마을로 이동했다. 1919년 당시 주민들이 ‘2일간의 해방’을 위해 걸었던 길을 해설사의 안내와 함께 스탬프투어로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스템프투어는 양성면사무소 앞 독립광장을 시작으로 양성공립보통학교 터-양성주재소 터-양성면사무소 터-양성우편소 터-융수지집 터-외리여수 가게 터-아야꼬 가게 터로 이어진다.

안성 독립운동가 ‘최은식 외 124인’ 판결문과 안성읍 내, 죽산지역 3.1운동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 1,000여 명은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합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양성 읍내로 출발했다.

구(舊) 한국기를 떠받들고 만세를 부르며 일본 관청이 불필요하다며 원곡면, 양성면 순사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했다.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다하여 습격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시위대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 외리여수와 아야꼬의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 융수지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경찰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주재소의(지금의 경찰서) 습격은 이해가 되는데, 왜 면사무소, 우편소(지금의 우체국), 민간인이 사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는 걸까? 파괴하고 방화하는 행위가 왜 정당할까?

당시 면사무소는 조선인의 편의를 위한 행정기관이 아니라 수탈을 위한 기관이었고, 우편소는 1910년 조선총독부가 우편과 전신전화 업무는 물론 국고금과 저축업무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기관이라 수탈한 자금의 보관 업무와 통신을 통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편소는 통신과 포탈 차단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항일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필요한 공격이었다. 안성 독립운동 판결문에서도 양성우편소를 파괴한 후 금고에 든 공금 17원을 강탈해 갔다고 하니 이를 뒷받침 한다. 또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융수지는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물려 원성이 높았던 인물로 선량한 민간인이라고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열 투쟁의 폭력은 정당한가? 의열 투쟁이 테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는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테러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개인 또는 일부 집단이 단체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의 의열 투쟁이 그들의 개인이나 집단의 사익을 위한 행위인지, 일본 통치자들이 인류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는 선량한 시민이었는가를 살펴본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의열 투쟁은 폭력에 항거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총과 칼에 맞서 태극기와 돌을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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