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여름은 언제 가나 싶게 무덥던 날씨가 갑자기 돌변해 가을옷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추위를 맞이하고 있다. 추위에 민감한 남편은 부랴부랴 긴 소매 옷에 가디건까지 걸치고 출근한다. 날이 추워졌으니 바로 자동차로 직행할법한데 현관을 나서자마자 마당 한쪽 텃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초여름에 심어 한창 열매를 맺고 있는 팥.
초여름에 심어 한창 열매를 맺고 있는 팥.

초여름에 씨앗을 직접 심어 지금은 한참 열매를 맺고 있는 팥을 둘러보며 행여 추운 날씨로 잘 자라지 못할까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생전 처음 심어본 농작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팥을 워낙 좋아하는 탓에 올겨울엔 직접 심은 팥으로 만든 팥칼국수, 시루떡, 팥앙금으로 만든 빵 등을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날이 추워졌으니 그 걱정은 더 클 수도 있겠다.

사실 남편은 팥으로 만든 음식을 찾아 먹을 정도로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2월 동지 때나 먹는, 그냥 때가 되면 으레 찾아오는 음식 중 하나로 여겼다. 지방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 성인이 되어 수도권으로 이사와 음식에 대한 문화적 차이를 겪으면서 받은 신선한 충격? 때문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대에 된장, 소금, 초고추장, 새우젓을 찍어 먹는지에 대한 촌놈(?)들의 흔한 논쟁처럼, 식당에서 팥죽에 소금이 아닌 설탕을 넣어 먹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땐 다소 충격적이었을법하다. 그런 경험이 있고 나서 그런지, 필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팥칼국수를 인생 최고의 음식 중 하나로 꼽는다.

이와 같은 지역색은 음식뿐만 아니라 ‘부추’와 ‘정구지’처럼 식물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필자가 처음 숲해설가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공부를 했을 때, 어머니나 어른들이 알려준 식물 이름과 공식적인 표준 이름이 달라 외우기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시골 마을 어귀나 담장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리골드.
시골 마을 어귀나 담장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리골드.

최근 눈에 좋다고 해서 꽃차로 주목 받고 있는 메리골드는 메리골드라는 이름보다 ‘서광’(사전을 찾아보면 같은 꽃이라고 나오지만 함께 수업을 듣던 다른 어르신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이라는 이름에 익숙했다.

시골 마을 어귀, 담장 밑, 밭 주변에는 반드시 메리골드가 있는데, 독특한 향이 나서 뱀이 싫어한다는 속설이 있다. 뱀을 쫓아내는데 효능이 있는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뱀이 한창 출몰하는 지금 시기에 꽃이 만개하니 뱀을 쉽게 볼 수 있는 시골에서는 반드시 심어야 하는 꽃 중 하나이다.

메리골드가 피기 전까지 마을 길을 노랑 빛으로 수놓았던 기생초는 ‘파리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혼 전 취미가 낚시였던 시절, 주말만 되면 가까운 대청호에 가서 낚시하는 게 즐거움이었던 때가 있었다. 유명한 낚시 포인트 중에 ‘똥섬’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옆에 물이 차면 섬으로 바뀌고 물이 빠지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유명 포인트가 있는데, 요맘때 그 섬이 기생초로 뒤덮여 장관을 이뤘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 생각이 나서 한 포기 뽑아 대문 입구에 심었는데, 엄마는 그 꽃을 ‘파리꽃’이라 불렀다. 그다음 해에야 파리꽃(기생초)의 무서움을 알았다. 한 포기 심었던 대문 앞이 온통 파리꽃으로 뒤덮였다. 대청호 섬을 가득 메웠던 그 기새로 우리 집 마당을 다 덮을 심산이었다.

이른 봄 줄기를 먹었던 수크령.
이른 봄 줄기를 먹었던 수크령.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먹어봤을법한 수크령은 ‘삐리’라 불렀다. 사자성어 ‘결초보은’의 풀을 묶어 은혜를 갚았다고 하는 그 풀이 바로 수크령이다. 요즘 그라스류 정원이 유행하는데 잡초였던 수크령이 정원식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수크령은 벼과 식물로, 봄철 연한 줄기는 어린아이 힘으로도 잘 뽑힌다.

동네 구멍가게조차 없던 시골 마을은 자연에서 간식거리를 채취하는 것도 즐거운 놀이 중 하나였다. 삐리를 주욱 뽑아 줄기 끝 하얀 부분을 손톱으로 밀어내면 하얀 속살이 나온다. 대단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닌 그 줄기 속에서 미약하나마 단맛을 느끼며 먹었던 어린 시절의 그 맛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날이 한참 추워지면 올해도 가족들이 좋아하는 팥칼국수를 만들어 아이들은 설탕을, 필자와 남편은 소금을 넣어 먹을 것이다. 한 가구 안에서도 문화 다양성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나, 소금을 넣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마음 한구석에 서운함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함께 즐거운 식사를 했다는 좋은 기억으로 가슴 한쪽에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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