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것 같다. 변변한 유치원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학교도 안 다니는 예닐곱 살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과 모여 노는 것뿐이었다.

벼꽃을 닮은 옥수수 수꽃
벼꽃을 닮은 옥수수 수꽃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엔 친구들과 마을 입구 개울가로 수영하러 가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필자 고향 마을엔 ‘동쪽골’과 ‘저건너’라는 두 개의 큰 개울이 있다. 해가 뜨는 동쪽에 있어서 ‘동쪽골’, 마을 저 건너에 있어서 ‘저건너’ 라고 지어졌던 듯싶다.

어린 시절엔 아무렇지도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렸던 그 이름이 커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성의없게 지어졌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처럼 근사한 수영정은 없었지만, 동쪽골과 저건너를 번갈아가며 친구들과 물놀이 다니는 건 무더운 여름날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기억 속 어느 날도 동쪽골로 수영하러 갔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친구들과 함께 오지 않고 호기롭게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섯 살 아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광활한 논, 논둑길을 지나면 밭, 또다시 광활한 논뿐이었다.

지주 역할을 하는 옥수수의 지상부 뿌리발
지주 역할을 하는 옥수수의 지상부 뿌리발

마을은 보이지 않고 논밭뿐인 곳에서 결국 길을 잃고 헤맸다. 어른이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꼬마가 혼자 걸어가기엔 버거운 거리였던 듯싶다. 헤매고 헤매다 간신히 익숙한 마을 길로 들어서 반가움에 한달음으로 집으로 달렸다.

길을 잃어 당황스러웠던 마음과 집을 찾아 돌아온 안도의 마음이 뒤엉켜 대성통곡을 하며 대문을 들어섰다.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옥수수를 쪄서 막 드시려던 참이었다. ‘엉엉’ 울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꼬맹이 이야기를 웃음기 참으며 들어주던 어른들, 솔솔 풍기는 구수한 옥수수 냄새, 다정히 건네지는 옥수수 한 덩이, 서러움이 풀어지는 꼬마의 마음. 어느 여름 날 꼬마의 기억 속에 새겨진 모습이다.

작년에 조그만 텃밭에 고추 농사를 지으면서 탄저병으로 고생을 엄청 했던 터라 올해에는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단, 옥수수는 제외였다. 어린 날 추억으로 옥수수는 필자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그래서 무늬만 농사꾼인 초보 농사꾼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작물이었다.

올해는 특히 씨앗을 파종해 모종을 직접 키워 심어서 관심과 애정이 더 남달랐다. 우려와 기대 속에 옥수수는 잘 자랐고, 몇 주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벼과 식물인 옥수수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여느 벼과 식물들처럼 바람에 의해 수정이 되는 풍매화로 자가수정을 막기 위해 수꽃이 먼저 피기 시작하고 암꽃이 늦게 핀다.

옥수수대 줄기 끝에 벼꽃처럼 피는 것이 수꽃이고, 수염이 달리는 것이 암꽃으로 수염 수만큼 옥수수가 달린다. 옥수수수염이 풍성하면 알이 좋은 옥수수가 열린다. 벌레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여러 겹의 껍질에 쌓여있는 옥수수는 수염이 마른 정도를 보고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 수 있다.

옥수수수염 암꽃
옥수수수염 암꽃

옥수수 한 그루에서 3~4개가 열리는데,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땅심을 많이 뺏어간다. 옥수수 심은 자리엔 콩을 주로 심는데, 옥수수대를 지주 삼아 심기도 한다. 하지만 질소를 고정해주는 콩을 심어 지력을 회복하기 위함이 크다. 마을 어르신들 밭을 보며 농사의 지혜를 눈으로 확인한다.

최근 다리를 다쳐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필자 덕분에 남편이 농사일을 전담하고 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풀 뽑기, 물주기, 잎 따주기, 북주기, 추가 비료 주기 등 많은 시간을 농사에 할애한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애정은 증가한다 했던가. 식물에게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요즘 남편의 관심사는 농사에 집중돼 옥수수대 키가 다른 집들보다 작은데 벌써 꽃이 피었네, 암꽃이 하나밖에 안 피었네 등등 걱정과 염려,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다행히 남편의 그 간절함을 알았던지 옥수수는 잘 자라 옆집 옥수수만큼 커졌고 옥수수도 계속 열리고 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속담이 거짓이 아님을 작은 텃밭에서 깨우친다.

필자에겐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편에겐 애정과 노력으로 키운 반려농작물 옥수수는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수확하자마자 쪄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얼른 먹고 싶은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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