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환
김장환

최근 용인문화원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 구호가 새겨진 ‘팔굉일우비’를 비롯해 송병준 부자 관련 석비 3점을 전시하는 <친일 상징물 전시관>을 개관했다. ‘팔굉일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연결해 인류 공동체 세상을 이룬다는 뜻으로,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이다. 이 석비는 이완용과 더불어 최고의 친일파로 손꼽히는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쓴 것으로, 2009년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되었다.

이처럼 용인에는 송병준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송병준이 1890년 양지현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양지면 추계리에 별저를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송병준 별저는 99칸으로 지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이었다. 하지만 광복 후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건물이 모두 헐리고 현재 온누리선교재단이 운영하는 종교시설이 들어서 있다.

다행히 동편 입구에 ‘영화지(映華池)’라는 부속 정원이 나무숲과 함께 남아 있다. 꽃이 물에 비친다는 뜻의 영화지는 조선시대 전통정원으로서 13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영화지를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원형 복원과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관리ㆍ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사유재산이므로 어떻게 훼손될지,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라도 서둘러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 전통정원이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부지방에 집중돼 있고 서울ㆍ경기도 일원에는 궁원이나 능원 외에 이렇다 할 민간정원이 없는 점을 감안할 때 영화지는 중부지방의 민간정원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친일 인사에 의해 조성된 유적이지만 이곳은 친일과 상관없이 지방 관료의 건축 및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조경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설령 친일 유적이라 하더라도 후세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군산이나 목포에 남아 있는 일제 침탈과 관련된 수많은 근대문화유산이 주목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지의 전체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자. 영화지는 크게 못과 섬, 그리고 못을 감싸고 있는 숲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못의 형태를 살펴보면 궁원이나 민간정원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의 구조가 아니라 크고 작은 두 개의 타원형 호안을 합쳐 8자형의 원지(圓池)를 만들고 큰 못 가운데 둥그런 섬을 조성했다.

이는 지형과 지세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정원을 조성할 때 자연을 영적 존재로 생각해 자연의 질서를 심하게 흩뜨리거나 조작하지 않는 습성으로 인해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이용해 왔다. 또 호안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 부분에 석축을 쌓았는데, 길가 쪽 석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무너져 내린 곳이 일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이다.

못 중앙에 섬으로 만들어진 원도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정자가 세워졌던 흔적이라 생각되는 주춧돌이 몇 개 남아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원도에 소나무를 심거나 정자를 세우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북쪽 숲에서 원도로 연결되는 철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부설한 다리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우리나라 전통 방식의 홍예교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가 마치 무지개 모양과 같다고 해서 홍예교(虹霓橋)라 하는데 일찍이 삼국시대 산성이나, 고분벽화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다.

다리 북편에는 정자가 있었던 자리에 주춧돌이 남아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8각의 주춧돌은 모서리마다 2개씩 16개가 박혀 있고, 가운데 2개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에 세워졌던 정자는 8각정이 확실하다. 옛 사진의 지붕을 분석해 보면 추녀마루가 모이는 중심점에 2-3단의 장식기와를 세운 절병통(節甁桶)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지를 감싸고 있는 숲을 둘러보면 100년이 훨씬 넘은 정원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수많은 고목이 숲을 덮고 있다. 숲 서편에 소나무처럼 생긴 금송이라는 나무도 보인다. 금송은 공주 무령왕릉의 관재(棺材)로 사용된 일본 원산의 신성한 나무이다. 밑둥 둘레가 3m에 이르는 것으로 봐서 수령 100년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송으로 알려진 국립공주박물관 정면의 금송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영화지는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영화지가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수십 년 동안 방치되고 있다는 점과 이것이 사유지인 관계로 주변 지역의 개발과 함께 당장이라도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시급히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받아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정밀한 지표조사를 통해 전통정원의 원형을 살려 정비하고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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