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모든 산과 들판은 꽃밭이다. 천상의 화원도 우리가 이맘때 보는 광경일 게다. 그저 느끼고 못 느낄 뿐이다. 광활한 산야의 야생화 천지가 아니라도, 잘 꾸며진 화단 속이 아닐지라도 담 밑 틈에 핀 한 줄기 민들레가 보여주는 세계다.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잘났다 못났다고 서로 시샘, 원망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꽃피운다. 벌과 나비 곤충들은 찾은 꽃에 꽃분이 없으면, 또 다른 꽃에 날아다니는 데 만족한다. 그야말로 자연스럽다.

뭇사람들은 이것저것을 비교할지 몰라도 풀과 나무는 봄날 자양분을 얻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다. 누구에게 사랑받기 위해 고운 자태를 뽐내지도 않는다. 연초록빛을 띤 초목은 일곱 색을 골라 자신만의 고깔로 달고 쓴다. 매화, 진달래나 목련 등은 잎사귀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트린 다음에 연푸른 날개를 편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감 만족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더 좋은 봄날이다. 고대 중국의 노자는《도덕경》에서 ‘불각(不刻)의 바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사람 손이 타지 않는 바위가 으뜸인 것처럼 “자연을 너무 부질없이 휘젓지 말라”고 했다. 지금의 산하는 숨 쉴 틈 없이 인산인해로 덮여있다. 어느 날 아침, 아파트 창가에 지저귀는 새소리도 싫다고 하던 아무개조차 그 대열에 합세하고 있다.

봄나들이로 힐링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다니는 산과 들에 사람의 흔적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자연과 조화를 강조한 불각도인 노자는 공자와 달리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세상 만물과 자연의 이치가 저절로 그리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그 속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라는 연기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올드보이란 이름의 노자는 “자연은 말이 없다”고 했다. 아파도 아프다고, 다쳐도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등산’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의 품에 들어가 관조·관상하는 자세로 봄나들이해야 한다. 옛 문인들은 꽃과 바위, 구름, 새, 벌레를 조용하게 관조할 때 비로소 참다운 가치가 나타난다고 했다.

17세기 말 청나라의 장조는《유몽영》 ‘아득한 꿈의 그림자’에서 봄날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함이요. 바위를 쌓은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소나무를 심는 것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파초를 심는 것은 바람을 맞기 위함이며, 버들을 심는 것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그는 “봄에는 문학, 여름에는 역사, 가을에는 사상, 겨울에는 경서”를 읽으며 관조하는 삶을 강조했다. “푸른 산이 있으면 바야흐로 푸른 물이 있다. 물은 오직 산에서 푸른 색깔을 빌렸을 뿐이다”라는 그의 글에는 역설이나 위트로 우리 일상을 촌철살인처럼 풍자한《유몽영》속 에피그램(epigram)으로 발견할 수 있다.

백령사 돈각스님
백령사 돈각스님

여러 문학적 에피그램은 18세기 실학자 이덕무의 《아정유고》에도 일상의 다양한 소리와 감정과 색깔과 모양과 분위기가 담겨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는 닮은 점은 관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마음일 것이다.

“사람들 봄날 길다고 말하지만, 따뜻한 날 빨리 지나가 나는 싫네. 마음 쏟아 좋은 벗 머물게 해, 마음 다해 좋은 시절 보내려 하네.”라고 이덕무의 시가 전한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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