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3월의 폭설은 이런 일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올해는 유난히도 봄을 맞이하기 힘겨웠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수십 년간 군부가 독재를 휘두르던 상황에서는 정작 한 번도 시도되지 못했던 대통령 탄핵이 이제 와서, 그것도 대다수 국민들이 납득하기 힘든 내용을 탄핵사유로 내세우며 다시 한 번 신성한 국회의사당을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망과 분노를 넘어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오랜 기다림과 지난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다시 광화문으로 향해야만 했던 그 길엔 마치 지난 17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87년 대선 당시로 되돌아가 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도록 이어지던 촛불행렬 속에서 역사란 그렇게 허망하게 뒤로 돌이켜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다시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까지 무등을 태우거나 손을 잡고 나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 손에 든 촛불이 다 타들어가도록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건 특정 정당을 지지해서도, 유달리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명분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욕심을 구국의 결단인 양 힘으로 밀어붙인 정치인들을 지켜보며 그저 이건 아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오랜 시간 지켜온 민주화의 싹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들이었다. 이제 그 촛불을 우리들 삶터 곳곳에서 밝혀야 할 것이다. 몇몇 정치인을 뽑아 국회로 보낸다고, 특정 정당의 집권으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아프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민주적인 사회를 살아낼 역량을 가져야 함을, 성숙된 시민사회라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음을 겸허히 되새기며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상 속에서 민주적인 삶이 구현되는 사회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총선 투표율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대다수 시민들이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였다는 용인시민신문 지난 호의 보도 내용은 더없이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4월초, 용인에서도 여러 시민단체가 언론사와 함께 17대 총선 후보자 초청 토론회를 가질 계획이다. 우리네 삶터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해법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더 이상 대한민국 국회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을지 회의가 들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희망을 버릴 권리는 없다. 우리 곁엔 지금도 덮어버리고만 싶은 이 부끄러운 현실을 그대로 지켜보며 하루하루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역의 이기주의에 매달리지 않고 진정으로 국민들의 요구를 대변해 올바른 정책을 펴나갈 인물을 가려내는 것이 우리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더 살만한 세상,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리는 세상일 거라는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박영숙(느티나무 문화재단 이사장·본지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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