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이동훈

1884년 갑신정변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은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구했다. 알렌의 활약으로 현대의학의 우수성에 대해서 인식한 조선 정부는 근대적 의료기관 설립에 나섰다. 1885년 1월 27일 알렌은 ‘Proposal for Founding an Hospital for the Government of His Majesty the King of Corea in Seoul’이라는 제안서를 내면서 ‘조선정부경중 병원건설절론(朝鮮政府京中病院建設節論)’으로 번역했다. 당시 조선에는 ‘의원’ 혹은 ‘~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으니 이때 처음으로 ‘병원’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1885년 4월 ‘공립의원규칙(公立醫院規則)’에서는 여전히 ‘의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의료기관의 대표 명칭이 의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렌이 주도적으로 설립에 나선 광혜원, 곧 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꾼 곳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공립 의료기관이다.

광혜원 이전에도 조선에 근대식 의료기관이 있었다. 일본과 교류가 많았던 부산에는 왜관이라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1877년 일본인 진료를 위한 일본 군의관이 배치된 제생의원이라는 의료기관을 설치하였다. 주된 치료 환자는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인 수백 명이 진료를 받았다. 부산의 제생의원은 부산부립병원으로, 광복 이후 부산시의료원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1905년 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을사늑약)한 이후 조선의 외교권뿐 아니라 의료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의학보다 훨씬 뛰어난 치료 효과를 보이면서 신뢰를 얻고 있었던 현대식 의료기관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효과가 있었다.

일제는 1909년 충청북도 청주와 전라북도 전주를 시작으로 전국 13개도에 자혜의원이라는 국립의료기관을 설치했다. 자혜의원들은 대민 진료뿐 아니라 일본인 환자, 특히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진료를 담당하기도 했다. 자혜의원은 1925년까지 25곳으로 증가했고, 급증한 운영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중앙 소속을 각 시도에 넘겼다. 자혜의원들은 시립·도립병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광복 이후 도립의료원이나 대학병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배 기간 동안 핵심 분야는 일본인이, 간단한 분야에만 조선인이 진출할 기회를 주었다. 의학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주요 병원의 핵심 인력은 일본인 의사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더해 한국인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에는 엄격한 설립규정과 표준을 강요했다.

일제의 구상은 공공의료기관을 확대해 감염병 등 의료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식민 정부의 통제 하에 관리하려는 의도로, 일제에 반발하는 한국인 의료기관이나 선교 병원들을 억압했다. 그 결과 1910년 125개의 병원 중 17곳에 불과했던 공공의료기관은 1942년에는 전체 177곳 중 67곳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정부 지원을 받은 공공의료기관은 병상, 시설 등에서 민간 의료기관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일제 식민지배 전 기간에 걸쳐서 공공의료 중심의 의료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공공의료기관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의료진들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3년 전체 의사 3813명의 30% 가까운 1194명이 일본인 의사였는데, 이들이 활동하던 시립병원이나 도립병원에서 의료 공백이 발생했다. 이어서 터진 6·25전쟁은 막대한 인적 손실과 의료시설이 파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쟁 이후 분단된 상황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북한은 의료시설을 국유화하면서 사회주의 의료체계를 수립해 나갔다.

대한민국 역시 국공립의료기관이 진료의 중심 역할을 해 1960년 전체 병상 9951병상 중 64%에 해당하는 6335병상이 공공의료기관이었다. 진료 환자 역시 1959년 입원 환자 200만명 중 120만명을 공공의료기관이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해방 직후 공공의료에 대한 논쟁은 좌익 계열에서 국영병원, 인민병원 확충과 인구, 지역에 따른 의료기관 적정배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우익 계열은 국가 재정의 한계와 인력 부족을 이유로 공공의료기관 확충은 쉽지 않으며 민간 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병원 설립을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전쟁 이후 국공립병원, 조합병원 등 공공의료를 강조했던 좌익 계열은 북한으로 이동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적 경찰 통제를 정리하고 민간 의료기관은 일상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한편, 국가는 공중보건, 빈민 의료서비스에 주력했다.

공중보건을 담당하기 위해 1947년 전국에 단 두 곳밖에 없던 보건소를 전국에 확대 설치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보건소 설치는 1961년에도 100곳에 불과했고, 전문인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공중 보건 위생 업무를 수행하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1962년 출범한 군사정권은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했고, 보건소 설치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군사 정부는 급격한 인구 증가가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에 장애 요인으로 판단하고 강력한 가족계획 정책을 펼쳤다. 1976년까지 전국 1340개의 면 지역에 보건지소를 설치하면서 실질적인 무의촌 지역은 사라지게 되었다.

국영병원들은 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좋은 설비와 많은 병상, 우수한 의료 인력을 확보하면서 진료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1960년대 이후 양상이 달라졌다. 공공의료기관의 급여 수준이 낮기에 일부 교수들은 근무시간이 끝난 후 개인 의원에서 야간 진료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반면 민간의료기관은 높은 급여를 제시하면서 우수한 의료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적극적으로 진료하면서 격차가 발생했다. 백인제 박사가 설립한 백병원의 경우 불과 60병상에 의사는 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월평균 외래환자수가 3900명에 이르러 500병상에 196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서울대병원 월평균 외래 환자수 9600명에 비교하면 의사 1인당 진료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민간 의료기관 중 일부는 진료수익을 재투자하면서 종합병원과 대학병원으로 성장했고, 1977년 민간 의료기관의 병상수가 1만5939병상으로 증가했다. 반면 공공의료기관은 9526병상으로 역전되는 상황이었다.

1977년 의료보험이 시작되었다.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확대되고 민간 의료기관 역시 모든 국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공공의료의 영역이던 전염병과 공중보건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전국민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한국의 경우 민간과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2015년 메르스와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서 경증 환자는 공공의료기관이, 위중증 환자 진료 및 예방접종은 민간의료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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