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에서 시작된 라인강은 스위스 경계를 지나 독일을 거쳐 북해까지 1320km에 걸쳐 흐르고 있다. 고대부터 로마제국의 경계가 되기도 했고, 물자를 운반하는 수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경계에 위치한 스위스 도시 바젤은 라인강 상류에 발달한 도시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자원과 학문이 스위스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미셔가 추출한 핵산(1874)
미셔가 추출한 핵산(1874)

1868년 바젤 의과대학을 졸업한 프리드리히 미셔는 고민에 빠졌다. 몇 년 전 심한 장티푸스로 고열에 시달리면서 청력이 손상되었기에 대화를 많이 하는 환자 진료보다 기초의학 연구로 방향을 잡았다. 독일 남부 튀링겐 대학은 자연과학 학부가 최초로 신설되면서 기초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유학을 간 젊은 의사는 당시 유망한 주제였던 세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현미경의 개발로 미생물과 세포를 분석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세포막 내부에 핵과 세포질은 쉽게 구분되었다. 그러나 세포막 내부 물질은 딱딱하게 고정된 것이 아닌 조금씩 미세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 막 밝혀지고 있었다.

미셔는 혈액 세포들 중 림프구에 관심이 있었으나 지도교수는 림프구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으로 백혈구 중 중성구를 연구하라고 권유했다. 중성구를 얻는 방법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감염된 환부를 덮는 붕대에는 고름이 묻어 나오는데, 고름이 바로 백혈구와 세균, 그리고 사멸된 조직들이었다.

붕대를 잘 씻어서 현미경으로 보면 백혈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붕대에서 세포를 분리하는 과정은 조심스러웠다. 청년은 세포질과 핵을 분리해서 핵 속 성분을 분석하려고 했다.

황산나트륨을 사용해서 세포질을 녹였다. 남은 물질은 천으로 걸러낸 뒤 비커에 침전시켰다. 과정 하나하나 현미경으로 확인하면서 진행되었다. 많은 시간이 걸린 고된 작업이었다. 얼마 뒤 침전물 하나가 생겼다. 이 침전물은 산과 결합해서 침전되었으나 염기성 용액에서 다시 녹았다. 자세히 분석해보자 약한 산성이었다. 침전물은 이전에 발견된 다른 물질과 전혀 새로운 성격이었다. 이 물질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실험 과정을 되집어가면서 내린 결론은 핵에 있던 것으로 생각했다. 산성 물질이 세포질을 녹여서 세포 내부의 핵만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이 핵을 둘러싼 막이 깨지면서 핵 내부의 물질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당시 세포 내부의 미세 기관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세포핵 자체는 현미경의 발전으로 1802년 발견되었다.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핵 내부에 유전 물질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새롭게 발견된 물질에 대해서 충분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연구의 진행을 망설였으나, 주변의 권유로 더 많은 재료를 얻어 분석해 보기로 했다. 기존 방법은 침전물이 너무 적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더 많고 순수한 물질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당시 새롭게 소개된 세포질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돼지 위를 세척해서 얻은 물과 염산 용액과 합친 것이다. 위 표면에서 나오는 펩신과 같은 소화효소가 세포질을 녹이는 것을 응용한 방법이다.

초기 방법으로는 알코올로 몇 차례 씻어야 했는데, 새로운 방법은 불과 몇 시간만 담가 두면 세포질이 녹아 미세한 회색 침전물과 노란색 액체로 분리되었다. 몇 차례 반복한 뒤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세포핵 성분만 남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하얀 양털 같은 침전물을 얻어 본격적인 분석에 나섰다. 미셔는 새로운 물질의 이름을 핵에서 유래한 ‘뉴클레인’이라고 붙였다. 뉴클레인을 분석해 본 결과 탄소, 수소, 산소, 질소와 인 성분이 있었는데 다른 단백질과 달리 인 성분의 비율이 높았다. 기존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미셔는 백혈구 이외 다른 곳 간, 신장 등의 세포에서도 동일한 성격의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새로운 뉴클레인의 역할에 대해서 여전히 잘 모르는 상태였다. 미셔는 심사숙고를 거듭하면서 뉴클레인에 인 성분이 많기 때문에 핵에서 분리되어서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레시틴이라는 단백질에 전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셔는 뉴클레인 성분이 많을수록 단백질이 풍부해지며 성장기 세포에서 관찰된다고 믿었다. 반대로 뉴클레인 성분이 적을 경우 단백질이 감소하며 세포가 퇴행되는 단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여기에 더해 세포가 분열할거나 증식할 때 특히 암세포의 경우 더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미셔의 발견은 곧바로 발표되지 못했다. 1870년 독일 연방의 통일을 반대하던 프랑스와 전쟁이 터진 것이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독일 동쪽의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을 구상하였고, 이를 견제하던 프랑스와 갈등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벌어지자 프랑스와 가까운 독일 남부 지역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미셔의 연구 결과 발표는 연기되었다.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난 후인 1871년 새로운 뉴클레인이라는 물질의 발견이 알려졌지만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1872년 바젤 의과대학에 28살의 젊은 미셔가 교수로 임용되었다. 수줍음 많은 교수의 아버지는 같은 의과대학 교수였고, 그의 삼촌 역시 바젤 의대에서 근무했었다. 주변에서는 아빠 찬스라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주변의 견제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뉴클레인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했다. 여러 세포들을 분석하면서 알이나 정자에서도 추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정자는 대부분 핵으로 구성되어 뉴클레인을 추출하기에 아주 좋은 원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년 바다에서 돌아오는 연어는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마침 바젤에는 연어를 잡는 수산업이 발달했다. 당시에는 냉장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파괴되기 쉬웠던 뉴클레인 추출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한겨울 밤에 연어를 잡아서 실험실에 옮겼다. 추운 냉기가 도는 실험실에서 많은 뉴클레인이 추출되었다. 충분한 지원이 없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순도가 높은 뉴클레인을 확보한 미셔는 연구 끝에 4개의 염기성 물질과 인산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동훈 원장
이동훈 원장

그러나 순수 뉴클레인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과학자들도 미셔의 방법을 따라 시도했으나 실패해 잘못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곤 했다. 1889년 독일의 리차드 알트만은 핵 속의 약산성 순수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이 물질의 이름을 ‘핵산’이라고 명명했다. 핵산은 20년 전 미셔가 발견한 뉴클레인과 같은 물질이었다. 핵산이 생물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유전적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 수십 년의 연구가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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