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을 터뜨린 작약은 우리집 정원 중심에 있다.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3, 4월 봄이 벚나무,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 나무에 피는 꽃이 한창이었다면 요즘은 초화류 꽃들이 여리여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시골집 마당 한 귀퉁이, 산책길에 만나는 마을 골목골목마다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눈이 호강하는 중이다.

요즘 코로나19 백신으로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를 구분한다는데, 백신을 맞고 아프면 젊은 세대, 아프지 않으면 나이 든 세대라며 그 기준이 초등학교 졸업이냐, 국민학교 졸업이냐로 구분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애석(?)하게도 필자는 국민학교 졸업 세대다.

국졸 세대 출신인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겠지만, 그 시절엔 ‘반공일’이 있었다. 토·일요일이 휴일인 지금과 달리 그 시절 토요일은 점심시간 전인 4교시까지 수업하고 하교했다. 하루 종일 휴일이 아닌 반 공휴일, 줄여서 반공일이다. 할머니들은 ‘방굉일’이라고 하셨던 아련한 추억이 있다. 물론 일요일이 하루 종일 쉬는 날이니 제일 좋았을 법 했겠지만, 휴일을 기다리는 토요일 오전 그 행복했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상상하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집에서 먹는 토요일 점심은 꿀맛이었다. 칼국수를 밀어주시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할 일은 친구들과 노는 게 다인 천하태평 인생이었다. 공휴일인 일요일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이라고 해봐야 뭐 특별하게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거나 아침 8시에 방영되는 만화를 시청하는 게 전부였지만 행복했던 기억이다.

요즘 그 시절 기분을 떠오르게 하는 순간을 종종 맞이하는데, 바로 꽃이 피기 직전이다. 우리 집 정원 가장 중심엔 작약이 있다. 10여 년 전 숲 체험수업 차 들렀던 한택식물원의 광활한 작약원에 펼쳐진 작약 꽃들을 보고 한눈에 반해 우리 정원이 생기면 꼭 키우겠다고 다짐했던 꽃이다. 하필이면 작약꽃이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작약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분홍빛 활짝 핀 작약이 녹색 잎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2년 전 화단을 꾸미면서 작약을 가장 먼저 심었다. 그렇게 심은 작약이 작년에 피었을 때 그 화려함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는데, 아뿔사 가장 절정의 그 순간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정작 꽃을 본 시간은 이삼일밖에 되지 않았다. 꽃이 크고, 꽃잎이 많고 여리여리하니 빗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축 쳐지고 금방 시들고 말았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허무한 순간이었다. 고작 이삼일 꽃 보자고 가장 중심의 자리를 내주다니, 비효율적이라는 계산까지 결론냈다.

작년 가을 작약을 옮기겠다고 결심했으나, 필자의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여전히, 작약 입장으로는 다행히, 올해도 중심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올해는 작년과 조금 다르게 매일 아침 마당으로 출근하며 꽃들의 변화를 살펴보는 즐거움으로 봄을 보냈다.

5월 초부터 꽃망울을 부풀리기 시작하는 작약을 보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연분홍빛 작은 꽃망울을 보는 순간 나와 작약은 하나였다. 하루하루 조금씩, 미세하게 변화하는 작약의 모습에 감동했다. 그렇게 클라이맥스를 기다리고 고대하는 그 순간순간이 행복이었다. 마치 국민학교 시절 ’반공일‘의 오전처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정원의 꽃들을 보며 머릿속을 맴도는 구절이다. 당장의 변화는 크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달라져있기를, 꽃들을 보면서 바라고 또 노력한다.그렇게 기다림의 순간에 맞이한 작약의 개화는 작년과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더 풍성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꽃 이면에 숨겨진 그 노력이 보였다. 올해도 많은 비로 오래가지 못 할 터이다.

그래도 괜찮다. 점으로 시작한 작은 꽃망울부터 함께 했기에, 그 기나긴 여정을 알기에 꽃이 핀 시기가 짧다고, 클라이맥스가 찰나라고 나무랄 수 없다. 그렇게 작약을 보면서 다른 많은 꽃도 보게 되었다. 다른 꽃들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화려한 순간을 위해 무던히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긴 시간을 견디고 꽃을 피운 친구도 있고, 여전히 열심히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친구도 있다. 이미 져서 고개 숙인 꽃들도 정원 풍경으로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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