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민신문
상단여백
HOME 기획 기획/특집
만세운동, 무장독립투쟁 그리고 용인창간 22주년 기획]용인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
“무릇 자기나라의 역사를 모르는 자는 미래를 꿈꿀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선조들이 어떤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으며,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어떤 전설과 영웅담이 묻혀 있는지 모르는 자는 앞으로 닥쳐올 난관을 헤쳐 나갈 지혜와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태어나 자랐거나, 매일 일하고 잠드는 곳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면 참된 애향심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발로 찾아가는 용인독립운동 유적지’ 중 일부-
 
해마다 3월이면 3·1절 기념행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를 기리거나,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등 수십 곳에 이르는 현충시설이 있는 경기 용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을사늑약’에 항거해 순국한 민영환과 이한응 등 일부 순국지사를 제외하고, 용인에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유적지와 독립운동가가 있는 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3·1만세운동을 기억해도 용인3·21, 수지3·29, 기흥3·30만세운동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다. 지역의 역사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에 항거한 만세운동이 3월 1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민중들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요구한 3·1운동뿐 아니라 용인에서도 용인3·21, 수지3·29, 기흥3·30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반외세 구국항쟁의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온 용인에는 용인 출신 독립지사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와 아픈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용인 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국권 침탈로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한 용인의 독립운동가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돼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른 대표적인 용인의 독립운동가를 사료에 기초해 살펴본다.
 
◇오광선·정현숙,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아버지, 부부와 딸 둘, 그리고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펼쳐진 오광선·정현숙(다른 이름 정정숙) 지사 가족의 40여년에 걸친 항일 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사이자 살아 있는 현대사로 일컫는다. 원삼 출신 오광선(1896~1967) 장군의 부친 오인수 의병은 1905년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강탈하자,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해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일본 토벌대와 수비대에 의해 붙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오광선과 정현숙 지사의 일생은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오 지사는 부친과 고향 삼악학교(처인구 원삼면 죽능리)를 세운 스승 여준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교관생활과 독립군 간부로 성장했다. 또 한국독립군 실전부대장으로 한중 연합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는 등 부친과 스승의 유지를 이어갔다. 여준 선생 사망 이후에는 임정 백범 주석의 명에 따라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 양성간부로 활약했으며, 일제치하에서 북경으로 잠입해 첩보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광복군 여전사 둘을 키운 이가 오광선 장군의 부인 정현숙 지사다. 정현숙(1900~1992) 지사는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에 가입해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두 딸 오희영(1924~1969)·희옥(1926년생) 자매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적을 끌어들이는 일) 등에 활약했다. 특히 맏딸 희영은 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에 소속돼 최전선에서 일본군에 맞서 선전활동과 초모공작에 투입됐다. 이후 중경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김구 주석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1914~1973)과 혼인해 ‘부부광복군’으로 활동했다. 
 
◇항일무장투쟁 이끈 독립투사 김혁
기흥읍 농서리 출생 김혁(1875~1939) 선생은 북로군정서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핵심 인물이다. 북만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군세를 수습하고 만주로 복귀해 각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는 일에 주력했다.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사관 양성에 힘썼는데, 사관들은 신민부 독립군의 중견간부로서 항일 무장투쟁의 기둥이 됐다.

김혁 장군은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통합 단체인 신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투쟁기반 확충과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항일운동에 매진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28년 1월 신민부 핵심 간부들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과 그에 매수된 만주경찰대에 붙잡혔다. 

192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은 뒤 신의주형무소, 평양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회유 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김혁 장군은 병을 얻어 1936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출옥 후 향리에서 요양했으나 오랜 옥고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9년 4월 23일 순국했다.
 
◇초기 항일투쟁의 선봉 의병장 임옥여
양지면 평창리에서 태어난 임옥여(1872~907)는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해 8월 이금풍·주창룡 등과 경기도 이천읍내에서 이천창의소 좌장이 돼 이천에 주둔해 있던 일본기병대를 급습했다.

8월 중순에는 이천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습격했고, 포군 70여명을 모집해 이동읍 굴암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는 등 이천 죽산 안성 용인 등을 누비며 일군과 교전했다. 친일 일진회원 5명과 일경 1명 등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리다가 그해 11월 10일 고향집에 잠시 들렀다가 양지 추계리 송병준 별장에 주둔하던 일본군에 체포된 뒤 끝까지 저항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남정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정각(1897~1967) 선생은 수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고, 이어 독립신문을 등사해 용인·수원·안성 등지에 배포해 자주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용인 등지에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촉발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바라던 조국 광복을 성취하지 못하고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선생은 조선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전기회사 등을 폭파하기 위해 이듬해 2월 서울에 잠입했지만 친일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옥한 남정각 선생은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진교민회를 조직해 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힘썼다.
 
◇독립운동의 한 길, 2대 3부자 홍재설 선생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동우회’라는 단체를 통해 항일 결사대를 조직한 홍재설(1873~1939) 지사. 선생은 일제가 1907년 광무황제(영친왕)를 인질로 일본에 끌고가려 하자, 대원들과 덕수궁 광장 주야농성에 나서 이토 히로부미의 서약을 받아내기도 했다.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단하러 갔다가 도망친 걸 알고 집에 불을 질러 내란죄로 체포돼 10년형을 받고 전라남도 지도로 유배를 갔다. 

홍재설 선생의 두 아들이 권종목 선생과 함께 용인 포곡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종욱·종협이다. 홍종욱(1892~1968)·종협(1899~1983) 형제는 1919년 3월 28일 당시 포곡면 금어리에서 권종목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해 군중 200여명과 합세,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10월을 받고 11개월 13일간 옥고를 치렀다. 
 
◇ 수지 3·29만세운동 이끈 안종각·홍재택
원삼에서 시작된 용인지역 만세운동은 3월 말 수지와 기흥으로 이어졌다. 수지 3·29만세운동을 발의하고 주도한 이들이 안종각(1888~1919)·홍재택(1870~1951) 선생이다. 안종각 선생은 1919년 머내만세운동 발의자 중 한 사람으로 주민들을 규합, 자신의 집에서 몇날 며칠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었다. 만세운동 당일에는 시위에 앞장서서 이끌다가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홍재택 지사는 1919년 머내만세운동 당시 수지, 구성 등 인근 지역을 사전에 연결하고 역할을 분담시키는 등 만세시위 구도를 기획했다.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형 90대 처분을 받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탄압을 받았다.

함승태 기자  stham@yongin21.co.kr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승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