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구 유럽은 국가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학문의 결과가 바로 현장에서 응용되는 환경이 조성됐다. 관념적인 이론뿐 아니라 실제 증명과 확인이 중시되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국제 질서가 재편된 유럽에서는 민족 국가들이 성립되고 있었고, 소국가로 분열됐던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국가 통일 작업이 시작됐다. 남부 독일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통일을 향해가던 프로이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 전쟁은 석 달도 안된 9월 1일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났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왕 빌헤름 1세를 설득해 이듬해인 1871년 1월 통일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독일제국은 프랑스 국경지역인 알자스-로렌지역을 점령했다. 알자스-로렌에서 거주하던 프랑스계 지식인들은 서쪽으로 이주했다. 알퐁스 도데가 쓴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이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알자스-로렌 지역의 스트라스부르대학 역시 많은 교수가 이주하고, 특히 전쟁의 포격으로 도서관이 부서지고 많은 책이 불탔다. 

새로운 점령지역인 알자스-로렌 지역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독일 정부는 스트라스부르대학에 대대적인 지원을 했다. 대학교 이름을 빌헤름 황제 대학 즉, 제국 대학으로 바꾸고 불타버린 책을 보충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서 7만권을 모아 보내고 부서진 건물들을 재건했다. 펠릭스 자일러, 아돌프 바이엘 같이 뛰어난 교수진이 배치되면서 1872년 200명 정도였던 재학생은 1898년 1000명이 넘는 독일의 명문대학으로 성장했다. 

1889년 독일 동쪽 끝에서 태어난 민코프스키는 서쪽 끝에 있는 빌헤름 황제대학까지 유학해 공부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던 민코프스키는 대학 연구실에 근무하던 조세프 메링을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메링이 연구하던 올리브 오일 성분의 위장약에 대해서 토론했다. 평소 기름 성분의 소화장애를 호소하던 민코프스키는 기름 성분 치료제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이들 이야기는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이 둘의 이야기는 소화기관 중 어느 부분이 작동해서 기름 성분을 분해하는가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곧 개를 이용한 동물실험을 해서 소화효소를 많이 분비하는 췌장을 제거한 뒤 기름 성분을 넣었을 때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췌장이 제거된 개는 기름 성분을 소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소변을 많이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민코프스키는 개의 소변을 분석한 결과 많은 양의 설탕 성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췌장을 제거하면서 당뇨가 발생한 것이다.

췌장이 당뇨의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나서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올라가는 혈당을 췌장 물질이 낮춰주는 역할을 하는데, 처음에는 이 모든 작용은 신경에 의해 조절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베일리스와 스탈링의 동물실험에서 신경을 제거한 뒤에도 여전히 소화효소가 분비되는 것이 확인되면서 호르몬이라는 새로운 물질에 대한 개념이 정립됐다. 소장 점막을 갈아서 추출한 물질에서 새로운 호르몬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던 중 1922년 캐나다의 개업의사 밴팅은 의대생 베스트와 함께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인슐린은 고혈당으로 고생하던 당뇨병 환자들에게는 기적의 물질이었다. 비슷한 시기 소장 점막에서 혈당을 떨어뜨리는 물질이 발견됐으나 밴팅의 인슐린이라는 엄청난 위업에 가려지면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약 30년간 소장 점막 추출물에 대한 연구는 정체됐다. 

1945년 맨하튼 프로젝트로 개발된 핵폭탄은 무서운 무기로서 역할 뿐 아니라 의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줬다. 바로 방사성 면역 검사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원자단위에 미세한 물질까지 측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혈액 속에 극미량 존재하는 각종 호르몬의 변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다. 1964년 인슐린 호르몬의 반응이 당분을 먹는 경우가 포도당을 정맥으로 주사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분비되는 사실이 발견됐다. 음식이 소장 점막을 자극해서 만들어지는 신호가 있다는 것이다.

잊혀졌던 소장 점막 추출물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됐고, 현재까지 두 가지 호르몬이 발견됐다. 이 호르몬들은 정상 혈당에서는 작용하지 않지만 혈당이 올라갈 때만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켰다. 혈당을 정상 이하로 낮추지 않는 특징은 당뇨약 과다 복용 때 발생하는 저혈당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들 효과를 증진시키는 약품들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안전한 당뇨치료제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기 사극 드라마 허준에서 주인공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직접 관찰해 의학을 발전시키고 명의가 돼 <동의보감>을 저술했다는 내용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이 일화는 허구로 실제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는 독창적인 내용이 아니라 명나라 태의원에 근무했던 공정현이 제작한 <만병회춘>의 ‘측신인도’ 등 동아시아 의학서적 그림을 인용한 개념도다. 동아시아 의학은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 기의 흐름이나 장기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목적이어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목적이 아닌 약점이 있었다.

조선에도 기회는 있었다. 1763년 영조 39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 과학을 연구하던 일본에서 한 의사가 통신사를 찾아 인체 해부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조선의 의관은 기이한 논설이며 인체를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며 잘라 말했다. 실험과 확인 정신이 없던 조선 의학이 정체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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