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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8년 11월, 중국 중부 지역인 양자강 일대에서 조조는 유비와 손권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중국의 중심지역을 장악한 조조에겐 남쪽으로 달아난 유비와 양자강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손권을 격파하면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손권은 주유를 대장으로 임명해 유비와 함께 조조를 막게 했다. 주유가 이끄는 연합군은 적벽에서 화공을 이용해 조조군을 크게 이기는 데 성공했다. 크게 패한 조조의 진영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유행했다. 추운 겨울 좋지 않은 위생상태에 집단생활을 하는 병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견디지 못한 조조는 철수해 북쪽 근거지로 돌아갔다.

고대 전염병이 역귀에 의해 생긴다는 생각으로 점을 쳐서 막아보려는 기록도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부여에 소발굽 모양을 가지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묘사가 있다. 우제점이라는 것인데 고대 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그러나 기도와 제사만으로 전염병을 퇴치할 수 없었기에 환자를 특별한 장소로 이동시켜 격리하는 방법이 시도됐다. 전염병이 발생한 사람들을 마을 밖에 초막을 지어 따로 살게 하거나, 양반이나 왕족들은 집을 옮겨서 질병을 피하는 방식이다. 당나라 때 일부 사원을 전염병 환자들이 모여 살 수 있게 격리하는 장소로 지정했는데, 이것을 ‘여인방(癘人坊)’이라고 불렀다. 

타지로 이동해 많은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전쟁터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기 쉬웠다. 1107년 고려 예종은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17만 명을 동원해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 완안부의 아골타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윤관이 건설한 9개의 성은 위기에 빠졌다. 1109년 고려군 7만여 명이 갈라수에서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에게 패배하면서 동북 지역을 잃게 됐다. 갈라수 전투에서 패배한 병사들은 깊은 실망감뿐 아니라 전염병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전염병이 고려 도성인 개경에 퍼진 것이다. 개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역병에 희생됐다. 고려 조정은 ‘구제도감’을 설치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구제도감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서울의 감염병 질환을 퇴치하기 위해 ‘대비원’과 ‘활인서’를 만들었다. 병의 유행이 심할 경우에는 감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병막을 만들어 치료했다. 세종은 감염병 치료법을 전국에 배포했고, 지방관이 감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해 관리 및 치료하고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중에 전염병이 유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해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동의보감에는 전염병 환자 집에 나쁜 기운이 발생해 몸에 들어가 병을 발생시키고, 예방법으로 참기름과 웅황, 주사를 콧구멍에 바르라고 기술돼 있는데 효과가 있을리 없었다. 질병의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던 당시에 많은 한계가 있었고, 전염병 유행으로 수십만 명이 희생되곤 했다. 

서구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구약성서> 중 하나인 레위기에는 피부 질환 환자를 격리하라는 말이 언급돼 있다. 랍비들이 환자의 환부를 살펴보면서 7일 간격으로 검진한 뒤 추가 격리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질병을 고쳐준다는 믿음으로 격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이뤄지지 못했다. 541년 동로마제국 수도에 치명적인 흑사병이 발생했다.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조차 흑사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전염병을 유발시킨다고 생각됐던 유대인, 사마리아인 등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대응해 격리 조치했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 없이 실시된 방역은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000년 뒤인 14세기 흑사병이 다시 유럽을 뒤흔들었을 때,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강력한 검역을 실시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1개월간 격리된 장소에 머무르게 한 뒤 건강한 것이 확인됐을 때만 도시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이후 기간은 40일로 늘어났다. 이런 강력한 대응으로 일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흑사병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다. 이후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입국 제한은 검역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콜레라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유럽 각국은 검역 방식을 활용해 입국자를 제한하고 격리하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시행된 검역은 국내에도 소개됐다. 1886년 콜레라 환자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온역장정’을 제정했다. 온역, 즉 열성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선박을 검역해 환자를 격리하고 소독하는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해방 이후 1954년 ‘항공검역법’이 만들어지고 체계적인 방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 사스, 메르스 등을 거치면서 방역과 격리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염병이 사라진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체계적인 전염성 질환 관리가 중요해지고 있다.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겠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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