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마을 이야기

#마을 입향조가 누구냐고요? 글쎄…#

마을에는 반드시 입향조가 있다. 전통적인 동족촌에서 처음 자리를 튼 사람이다. 구성읍 하지석 역시 마찬가지다.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곡부 공씨(曲阜 孔氏)가 마을의 첫 주인이다. 인근에 산재한 묘석의 기록으로 보나, 족보를 살펴봐도 그렇다. 처음 터를 잡은 이는 공미수(孔眉壽)다. 그의 출생년대를 알 수는 없으나 조광조와 같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던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의 손자임은 확실하다. 비문에 따르면 ‘미수께서 서기 1580년경 공서린과 아버지 심(諶)이 살았던 (남사면) 완장리에서 구성면 상하리로 낙향하였으며, 덕일 등 자손이 번성하였다’고 돼 있다. 이로 볼 때 지금까지 400여 년간 마을의 터주 대감 노릇을 한 것은 곡부 공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록에 의한 근거가 아니라, 또 다른 물증에 따르면 이들보다 앞선 주인이 있었다. 누군가를 알 수 없는 고인돌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이름 그대로 고인돌은 돌을 고여 만든 청동기 시대, 즉 선사시대의 유적으로서 무덤방이다. 신석기 원시공동체 사회가 계급사회로 전환되면서 생겨난 고인돌은 축조 당시의 인구수를 가정해 볼 때 권력자인 족장 뿐 아니라 일반민의 무덤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화된 인식이다.

# 할미바위에 얽힌 전설#

구성읍 상하리 하지곡 마을은 고인돌을 마을 이름으로 쓰는 드문 경우이자, 동제(洞祭)의 대상으로 삼는 거의 유일한 마을이다. 42번 국도 상에 접해있는 상하리 고인돌. 언제 도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면과 후면의 면석은 훼손되고, 좌우의 면석 고인돌은 덮개 돌에 짓눌린 채 쓰러져 있다. 크기는 중형으로 장축은 남서형이다. 고인돌은 대개 평지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구흥천 상류에 인접한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한 시기까지도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에 있는 것은 상지석, 아래 것을 하지석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상·하지석의 두 음을 따서 ‘상하리’라고 하였다.

윗마을 지석은 일명 할아버지 바위라 했으나, 도괴 된 후 멸실되었고, 현재 아래지석은 할미바위라 불러 왔다. 하지석 마을의 고인돌이 ‘할미바위’로 불리게 된 동기는 두 가지 설로 전해진다. 옛 이야기에 의하면 하룻밤 사이에 할미산성을 쌓았다는 하는 ‘마고할머니’가 그 곳 바위중 하나를 현 위치로 옮겨놓았다고 하며, 그때 그 할머니의 손자국이 바위에 나 있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마을 지명 유래와도 관계가 있다. 이 고장엔 큰 고인돌이 둘 있었다. 윗 마을인 민제궁에 있는 상지석을 ‘할아버지 바위’라 하고, 아래 마을인 하지석 고인돌을 ‘할머니 바위’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고인돌에 얽힌 설화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마고 할미’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설화 중 ‘마고 할미’는 오른 발은 동해에, 왼발은 서해에 담근 채 한라산을 베고 잤다는 전설 속 인물 역시 할머니다. 할아버지 바위에 대한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마고 할미’전설과 유사한 경우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무덤인 지석묘가 신앙인 마을#

이 지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우리 나라 지석묘에는 집단적인 신앙은 없고 혹은 개인들이 약간의 미신적인 신앙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지석만은 개별적인 신앙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마을 차원에서 동제(洞祭)의 형태로 숭상하고 있다. 예전에는 지석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지붕을 얻어 보호했다. 그리고 터주를 받침돌 사이에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마고 할미의 집으로서, 또는 장사의 무덤에 대한 숭상의 개념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마을의 토지신이기에, 이를 신봉함으로 해서 주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택지개발 관돌마을 사라질 위기#

제사는 한해도 거른 적이 없다. 택일하여 제사 준비를 했다가도, 동네에 부정한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을 중지되고 뒤로 물린다. 다음에 다시 1년이 넘어가기 전에 택일하여 제사를 지낸다.

매년 한번씩 상달(음력 10월)이 되면 택일을 한다. 당주가 정해지고 집집이 돈을 거두어 소 한 마리를 잡는다. 그 만큼 최대한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다. 이와 더불어 일반제사에서 사용하는 음식물을 그 지석 앞에 올린다.

고인돌마을인 상하3리는 주위환경은 많이 나빠졌다. 곡부 공씨들의 집성촌이었던 마을도 300여 호로 불어났고 30년 이상된 토박이들은 고작 열 서너집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전통을 지키는 일은 쉬워 보이질 않는다.

더 큰일이 있다. 택지개발지로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고인돌과 함께 수천년을 이어온 괸돌마을, 전국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누대에 걸진 고인돌 동제. 과연 내년에도 그 동제를 또 치를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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