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나무 열매

결혼 후 신혼살림을 용인에서 시작했지만 곧 직장을 따라 타지로 나가 살다가 다시 용인으로 돌아와 살게 된 처인구 백암면 마당 있는 집. 우릴 환영이라도 하는 듯 선물이 어디선가에서 날아왔다.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처럼 아마 어느 새가 전해주었으리라. 작은 씨앗에서 싹을 틔운 후 쑥쑥 자라 곧 작은 잎들이 줄줄이 마주 달렸고 가시가 돋았다. 정체를 보니 독특한 향이 나는 산초나무였다. 이듬해 1미터 넘게 자랐고 삼년 째 되니 필자 키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가 됐다. 아무리 나무라지만 이렇게 쑥쑥 자라는 모습이 마냥 대견하고 신기했다. 

그러자 자연으로부터 선물이 또 배달됐다. 노랗고 동글동글한 좁쌀보다 작은 알이 잎에 붙어 있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산초나무 잎을 먹고 자랐다. 변신의 귀재는 이 애벌레를 두고 한 말이리라. 다섯 번 허물을 벗는 동안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울퉁불퉁한 갈색 해삼처럼 생겼다가 줄무늬와 함께 점점 갈색이 연해지고 초록이 더해지는 색으로 변하다가 급기야 매끈매끈한 몸매의 초록애벌레로 변했다. 산초나무 잎을 사각사각 갉아 먹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마침내 번데기가 됐다가 날이 좋은 날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마당에서 호랑나비의 일대기를 지켜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기꺼이 제 잎을 내어주며 애벌레를 품어준 산초나무가 선사한 삶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전셋집 주인은 산초나무가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찾아와 잡초들을 없앤다며 우리 가족이 심어놓았던 미처 꽃이 피지 못한 야생화 풀들과 산초나무를 싹둑 잘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집에 대한 소유의 욕심 없이 살던 순진한 부부에게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결심을 갖게 한 단초가 됐다. 

그렇게 마련한 지금의 집으로 이사와 살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뒷마당 장독대 너머 끝자락에 마치 그곳이 제자리인 양 또 산초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이쯤이면 운명이런가. 이번에도 삼 년쯤 지나니 키가 웬만큼 자란 산초나무가 됐고 호랑나비들은 또 찾아왔다. 어느덧 산초나무는 사람 키를 훌쩍 넘고 가지도 쭉쭉 뻗어 큰 나무가 됐다. 매년 살펴보지 않아도 우리 집 마당엔 호랑나비, 제비나비가 나플나플 날아다니는 모습이 일상이 됐다. 같은 호랑나비과인 제비나비와 긴꼬리제비나비도 산초나무 잎을 먹으며 애벌레 시절을 보낸다. 호랑나비는 산초나무 외에도 황벽나무, 탱자나무, 초피나무, 백선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독특하고 강한 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강한 향을 가진 잎을 먹으며 애벌레들은 몸에 향을 축적해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 사용한다. 

호랑나비 애벌래

호랑나비만 그 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산초나무 하면 추어탕에 먹는 제피가루를 먼저 떠올린다. 남부지방에서는 초피나무 열매를 갈아 제피가루라 하고 초피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중부지방에서는 산초나무 열매를 갈아 제피가루라 부른다. 둘을 혼동해 쓸 만큼 두 나무는 닮아있다. 다만 초피나무는 잎 끝이 물결치듯이 너울너울 대는 것이 특징이다. 용인에선 백암면 조비산 조천사 마당 옆에 스님이 일부러 심으신 건지 초피나무가 자라고 있어 초피와 산초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산초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기도 한다. 산초기름은 약으로도, 음식으로도 먹는다. 또한 어린 잎으로 간장장아찌를 담그기도 하고 된장에 섞으면 고기를 먹을 때 쌈장으로도 훌륭하다. 

산초나무를 처음 보는 사람은 줄기에 달린 가시에 놀란다. 행여 스치기라도 하면 날 선 가시에 상처를 입는다. 대표적인 가시나무인 아까시나무의 가시는 잎이 변해 가시가 된 것으로 잎과 비슷한 위치에 생겼다가 낙엽 지듯이 떨어진다. 그러나 산초나무의 가시는 줄기가 변해 된 것으로 줄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테가 생기며 굵어지듯이 산초나무의 가시는 떨어지지 않고 줄기에 달리는 아랫부분이 켜켜이 쌓이듯이 나이테가 생겨 마치 밥그릇 뒤집어놓은 모양으로 둥글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 뾰족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거나 무뎌져 이 밥그릇 모양만 남게 된다. 그래서 나이 들고 굵어진 산초나무 아랫 줄기에는 돌기처럼 오돌토돌한 가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필자는 운이 좋아 산초나무가 마당으로 찾아와 주었지만 마당이 없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산초나무는 우리 산에 너무나 흔해 어딜 가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랑나비 애벌레를 만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 따라야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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