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화의틈새문화35]

춤맛을 찾아 나선 여정

그는 자신의 춤인생을 일컬어 우리 춤의 참맛을 찾아 나선 여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참맛을 보기 위해 그 높은 계보의 벽을 월담하였고, 그 집안 맛깔의 비밀을 자기 춤사위 주머니에 담아 무사히 도망치기도 수차례. 그러나 그 역시 이동안 선생과의 만남은 월담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수수께끼라고 말합니다. 발탈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탓에 춤판에서는 거의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재인청의 춤을 만난 것이라든가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는 우연과 운명이 씨줄과 날줄로 얽힌 까닭이라는 것이지요. 선생의 것인지도 모르고 일찍이 매료되었던 기본무가 바로 우연이었다면, 그 우연의 주인공을 찾아 10년 넘게 선생의 춤을 배웠고, 운명의 마지막 제자로 남게 하였다는 겁니다.

다른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가 ‘운명’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1995년 7월 15일 수원 화령전(華寧殿) 앞마당, 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는 뜻밖에도 상주가 될 뻔합니다. 복잡한 가계로 마땅히 상주가 되어야 했을 아들 하나 나서지 않은 탓에,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단 한 명의 춤 제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탓에 주변에선 여성인 그에게 상주를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 상주 노릇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정주미씨는 이 때를 돌이켜 재인청 춤의 상주가 되었다고 간주합니다. 물론 이거야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겠으나, 그는 이후로 선생의 추모 공연이며 재인청 춤판 마련은 물론, 학술적인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아 석사학위 논문으로 여러 강연회에 초청되어서도 강연의 주요리로 재인청 메뉴를 빠뜨리는 예는 없습니다.

참맛을 본 춤꾼

선생의 주변에 많은 제자가 모이지 못한 이유 중에는 발탈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아 춤꾼으로서의 면모가 가려진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사리 춤 제자로 입문하였다 하여도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춤 순서 하나 전수받는데 일이년은 기본이었다는 것도 찾았던 발길을 돌리게 하고만 것이었습니다. 문하생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분명 선생의 가르침은 더딘 것이었습니다.

그런 선생 밑에서 정주미는 그래도 그 성취가 빠른 편이었습니다. 사사의 첫 춤이었던 태평무는 일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었는데, 놀라운 일은 선생께선 전에 없이 악사들을 모아 손수 장단을 이끌어 녹음을 떠주시고 태평무만은 내가 짊어진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노라고 전에 없던 이수증까지 써주신 것이었습니다. 병원 출입이 유난히 잦으시던 일년 남짓의 여일(餘日)에선 선생은 정주미에게 자신의 모든 춤을 가르치시길 원하셨지만, 신칼대신무에서 진쇠무로 넘어가 진쇠장단을 남겨 놓았을 즈음, 선생은 영원히 잠드시고 맙니다.

정주미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제대로 춤을 추셨고, 자신의 문하생 역시 제대로 춤추기를 원하셨던 선생의 춤세계와 업적은 당연히 정립되어야만 합니다. 그 당연함을 위하여 이렇듯 저의 손길을 이끄시는 선생의 증언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재인청 춤을 일러, ‘장단과 춤이 절묘하게 어울려 한 몸이 되는 춤, 어떤 춤사위도 단단한 균형이 있어 흐름이 도도한 춤, 또한 고도의 기교가 필요한 춤사위들을 잇대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추는 춤을 보여 주신 춤꾼 이동안, 그는 우리 춤의 맥을 이어내린 춤꾼이었으며, 우리 춤의 표본인 동시에 우리 춤의 가치를 계승한 춤꾼’이었음을, 그래서 ‘우리 춤의 산 증인’으로 그저 한줄기 춤으로만 흘러 온 것이 아니라 '면면히 살아서 이어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글을 맺습니다.

참 기막힌 안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재인청 춤이 갖는 본질을 들여다 본 춤꾼입니다. 저야 ‘본질’이라고 하여 학술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는 ‘우리 춤의 참맛’이라고 하여 보다 피부에 닿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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